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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국어의 두 가지 풍경, BTS와 aka

입력
2019.06.03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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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열린 서머 콘서트에서 BTS가 무대를 장식하고 있다. 연합뉴스
15일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열린 서머 콘서트에서 BTS가 무대를 장식하고 있다. 연합뉴스

요즘 해외 한류팬 사이에 ‘한영어’가 유행이라고 한다. 영어 문장에 우리말 단어를 섞어 쓰는 건데 방탄소년단의 뉴욕 콘서트에 등장한 ‘Oppa is jinjja cute!’(오빠는 진짜 귀여워)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어에 영어 단어를 마구잡이로 섞어 쓰는 사람들만 보아왔던 기성세대로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다.

지난 여름에 만난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자는 더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주었다. 날마다 영어의 변화를 관찰하며 사전에 실을 새 말을 수집하는 그가 주목한 단어는 바로 ‘오빠(oppa)’와 ‘치맥(chimaek)’이었다. 그는 이 말들이 영어 문장에 등장하는 빈도가 최근 눈에 띄게 높아져 곧 영어사전에 실릴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에 매혹된 세계의 젊은이들이 우리 문화를 상징하는 단어들까지 적극적으로 가져다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영어권에 소개된 우리말 단어들이 ‘chaebol(재벌) gapjil(갑질), hwabyung(화병)’같이 주로 부정적 어감을 지닌 말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변화는 놀랍고 반갑다.

하지만 근래의 우리 언어생활은 외국에서 들려오는 이런 소식에 마냥 뿌듯해만 해도 좋은지 돌아보게 만든다. 말을 지나치게 축약하고 변형하거나 외래어 외국어의 남용을 문제 삼는 목소리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건만 현실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특히 정책용어나 방송언어 등 대중적 영향력이 큰 영역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농촌 어메니티 체험’(→쾌적한 농촌 체험)이나 ‘패스트 트랙’(→신속처리제도) 같은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방송 자막은 외래어 단어를 하나둘 섞어 쓰는 것에서 더 나아가, 아예 영어 표현을 통째 들여다 쓰기도 한다. 몇 해 전부터 눈에 띈 TMI가 ‘too much information(지나치게 많은 정보)’의 줄임말이란 것을 이제 겨우 알았는데, 요새는 aka라는 말이 새로 등장했다. ‘-으로도 알려진, 일명’ 등을 뜻하는 영어 표현 ‘also known as’의 약자로, 잘 알려진 이름 외에 다른 명칭이 있을 때 쓰는 말이란다. 영어를 수십년씩 배운 주변의 지인들 중 누구도 이 말을 단박에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검색이나 사전을 통해 알아보거나 다른 사람에게 설명을 들은 다음에야 이해를 할 수 있었단다.

외래어 사용을 줄이자는 말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외래어 외국어가 우리말의 순수성을 해치고 우리말의 발전을 가로막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그런 면이 없지는 않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지나치게 외래어를 많이 사용함으로써 외국어 지식이 없는 많은 사람들을 의사소통에서 소외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외래어 사용은 사실 필수적이다. 실제로 외래어가 전혀 없이 고유의 순수성을 간직한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외국어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고립된 언어는 바람직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외국의 언어문화와 다양한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고유문화는 더욱 풍부해지고 발전하게 마련이며, 요즘 같은 세계화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오빠’와 ‘치맥’도 영어 입장에서는 외래 요소지만 그들의 언어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하므로 외래어가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혜택을 누려야 할 제도나 정책의 이름, 또는 정성껏 만들어져 여러 사람이 즐겨야 할 방송이 지나치게 어려운 말을 사용해서 그 대상자를 배제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공공부문에서의 잘못된 국어사용은 구성원들 간의 소통을 가로막아 사회 통합의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쉽고 바른 언어를 사용하면, 공공부문이 애초 기획한 좋은 의도를 더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이다. 공공부문 종사자들이 우리 말과 글에 대해 보다 세심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우리말과 우리 문화의 발전과 보전, 그리고 확산에 크게 기여하기를 바란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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