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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의 통찰력강의] ‘여자’ 중고등학교 유감

입력
2019.05.28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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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경기여고 학생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경기여고 학생들. 한국일보 자료사진

얼마 전 강릉의 한 호텔에서 열린 강원도 초등여교장협의회 연수에 다녀왔다. 호텔에서 환영 현수막을 달았는데 ‘여성 지도자’ 운운하는 글귀가 거슬린다고 불평한 분들도 계셨던 모양이다. 그 말에 반가웠다. 그릇된 관행에 따끔하게 질타하는 지성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강연을 시작하면서 그 문제를 끄집어냈다. “그런데 왜 여전히 존재하는 ‘여자중학교’ ‘여자고등학교’의 이름에는 분노하지 않으시나요?”

어떤 분들은 수긍하고 어떤 분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심지어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전통’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쓸데없는 시비라는 뜻일 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반문한다. “예를 들어, 여학생만 다니는 고등학교라서 ‘춘천여자고등학교’라면, 남학생들만 다니는 고등학교는 ‘춘천남자고등학교’라고 해야 최소한 명칭상의 평등이 되는 것 아닐까요?” 요즘 ‘여류시인’이나 ‘여류화가’ 따위의 이름은 많이 사라졌다. ‘남류시인’이나 ‘남류화가’가 있다면 모를까 여자에게만 굳이 ‘여류’라고 이름을 덧대는 건 웃기는 일이다. 1970년대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여학생수가 60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전체 재학생 가운데 여학생이 더 많다. 여전히 ‘여자중학교’ ‘여자고등학교’가 존재한다. 지금은 20세기가 아니라 21세기다. 제4차 산업혁명 운운하는 변화와 혁명의 시대다. 그런데 여전히 지난 세기의 낡은 사고가 남아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강연 때마다 이 문제를 제기한다. 만약 내가 ‘여자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학교 이름에서 ‘여자’라는 명칭이 사라지면 어떤 느낌일까?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할 것이다. 기존의 ‘여자’ 고등학교라는 이름은 과거에 남아선호 현상에서 아들은 상급학교에 보내도 딸은 그러지 않았던 시대에 여학교의 숫자가 훨씬 적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 ‘여자’라는 ‘첨가의’ 이름은 ‘여자답게’ ‘여성스럽게’ 운운하는 정서가 내재된 것이다. 남성중심의 사고에서 나온 폭력적(?) 태도다. 심지어 ‘현모양처’가 교훈인 학교도 있었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여자’라는 이름을 떼면 나는 성별로 인한 구별이 차별을 은연 중 깔고 있는 현실에 대해 실감할 것이고 훨씬 더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인식을 갖게 될 것 같다. 그걸 어른들이, 선배들이 떼줘야 하는 것 아닌가? 어른들은 불행히도 그런 혜택을 누리지 못했지만 자녀들 후배들은 ‘마땅히’ 대등하고 독립적인 주체로서 살아야 한다.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아무렇게나 자녀 이름 짓는 부모는 없다. 때로는 비싼 돈 내고 좋은 이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사회적이고 공적인 이름에서는 별무신경이라면? 이건 아니다! 내 아이들이 제대로 된 양성평등의 사회에서 건강하게 살도록 해야 하는 게 부모와 어른의 몫이다. 그걸 외면하거나 묵인하면 안 된다. 내가 까칠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익숙해서 미처 깨닫지 못하는 그릇된 관행이라면 반드시 뜯어고쳐야 한다.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쓰고 ‘백년하청’이라고 읽는다. 대학입시에만 매달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늘 갈팡질팡하는 모습이다. 교육의 원천적 한계는 ‘과거를 살아온 사람이 과거의 방식으로 미래를 살아갈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다. 앞과 뒤는 고정상수다. 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과거의 방식’을 ‘미래에 맞는 방식’으로 바꾸는 것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은 무조건 진보다. 그런데도 우리의 교육은 보수적이고 사회적 인식도 그렇다. 잘못 생각해도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교육은 거창한 게 아니라 그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노동력을 배양하고 공급하는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다. 거기에 인간의 가치와 도리를 학습하는 것이다. 학교는 의무만 강요하고 학습시키는 게 아니라 먼저 권리를 가르쳐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교사들 자신이 권리는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의무만 학습되며 살아왔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권리를 가르치지 못한다.

교육은 사회의 미래를 마련하는 가장 기본적인 못자리다. 대학입시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미 그런 시대는 끝났다. 아직 이전의 관성에서 온전하게 벗어나지 못했을 뿐 이미 임계점을 넘었다는 건 모두 인식한다. 그런데 제도를 바꾸려면 많은 절차와 비용이 필요하고 사회구성원의 동의를 얻어내는 건 더더욱 힘겨운 과정이다. 그래서 엄두를 내지 못한다. ‘~여자중학교’ ‘~여자고등학교’에서 ‘여자’라는 이름을 떼는 데에 헌법이나 법률을 바꿔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위법 손질로 충분하다.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나라에는 ‘여자’ 이름 태연하게 달고 있는 학교들이 넘친다. 나는 그 이름 볼 때마다 불편하고 화가 치민다. ‘경기여자고등학교’가 존재하려면 ‘경기고등학교’가 ‘경기남자고등학교’로 바뀌어야 한다. 최소한 그 정도의 균형은 갖춰야하지 않겠는가? 21세기에 살면서 20세기 사고에 머물러 사는 걸 부끄러워해야 한다. 생각이 바뀌어야 삶이 바뀌고 미래가 바뀐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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