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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분식 시대의 리바이벌

입력
2019.05.24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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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제일 핫한 건 음식이다. 단돈 몇천 원 하는 거리 음식에서 수십만 원짜리 코스 요리까지. 음식은 단 한 장의 이미지로 자신의 현재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가장 요긴한 소재가 됐다. 음식은 그 자체로 디자인 충만한 완성품이고, 감각의 최전선이다. 그런 SNS에서 다시 분식 바람이 분다. 아니 분식 시대다. 쌀과 같은 ‘입곡’을 쪄서 밥을 만들어 먹는 대신 가루에 물을 반죽해서 만드는 분식은 아마도 우리 식생활사 5,000년에서 가장 충격적인 변화였다.

우리 스스로 분식을 원한 건 아니었다. 쌀은 부족했고, 미국은 넘치는 밀가루를 제공했다. 분식은 전쟁 후인 1950, 60년대에 크게 성장했다. 미국은 법률을 만들어 대외 식량 원조의 법적 기초까지 닦았다. 배고팠던 전후 유럽과 미국의 점령국이던 일본, 한반도의 남쪽은 밀가루 원조로 식량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강력하게 분식 드라이브를 걸었다. 총력 체제였다. 강제적인 분식 장려에 나섰다. 공장에서 생산하는 국수와 빵, 과자가 우리 입에 들어 왔다. 밀가루는 ‘분식집’이라는 미증유의 식당을 통해 거리에서 뿌려졌다. 옛 세대는 그걸 추억으로 회자한다. 당대는 분식집을 새로운 유행으로 소비한다. 분식집의 리바이벌, 재개봉이다.

분식집이 다루던 메뉴는 다채로웠다. 중국인에서 비롯된 만두와 찐빵에 일식 우동과 샌드위치, 인스턴트라면에 자생적인 떡볶이와 쫄면까지 갖췄다. 지금 쉰 살 넘은 국민의 몸은 밀가루로 말미암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기 위해 먹었고, 맛으로 먹었다. 분식집은 미팅 장소였고, 허기를 메우는 영양 공급소였다. 밀가루 권장하던 시대가 끝나도 분식집은 살아남았다. 가루 음식 대신 쌀밥 메뉴가 추가됐다. 제육볶음, 오징어볶음, 된장찌개와 김치찌개에 김밥이 분식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분식이 주력 메뉴가 아닌 분식집이라는 기묘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요즘 찾아온 복고적 분식집 전성기는 사뭇 이채롭다. 세계의 모든 음식 장르와 장구한 세월동안 메뉴를 쌓아온 우리식 분식집 문화가 결합됐다. 사진발 좋은 담음새에 서양과 일본 음식을 과감하게 차용한다. 이제 세상 음식은 사실상 패를 다 까놓고 치는 카드놀이 같다. 인터넷과 유튜브에서 얼마든지 레시피를 건질 수 있으며, 언제든 잘나가는 유사 업종의 히트작을 다음날 모방해서 메뉴에 올릴 수도 있다. 그러다보니 레파토리는 화려한데 개성은 별로인 경우도 많다. 더 많은 카메라 세례를 받기 위해 만들어낸 음식은 억지스럽고, 마치 찍어낸 것 같은 인테리어 디자인도 식상해진다. 아예 ‘인스타 분식집’이라는 장르도 생겼다.

속내는 또 다르다. 무얼 해서 먹고 살 수 있을까. 그 단순한 고민과 질문이 외식업에 뛰어들게 되고, 분식집도 그 선택의 하나다. 무한경쟁에 내몰려 당장 먹고 살아야 할 청년들, 자영업자들이 벌여놓은 사업의 다수가 분식집이다. 과거 분식집은 그야말로 하루를 연명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요새는 양극화다. 한탕을 꿈꾸는 ‘사업가’와 소박한 생존 요리가 병존하는 것 또한 요즘 분식집의 특징이다. 도대체 이런 매출로 어떻게 먹고 살까 싶게 빤한 기대 이익을 보여주는가 하면, 레스토랑 뺨치는 실내장식에 비싼 음식값(분식은 비싸면 안돼?), 대형 프랜차이즈를 염두에 두거나 이미 구축한 업체들도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정교한 메뉴(카피 천국이지만)와 디자인, 만만치 않은 가격, 세련된 서비스까지 일정 규모 이상의 자본이 들어와 있다.

다시 분식 시대가 시작됐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불황이 만들어낸 그림자를 넘어선 무엇이 있다. 값싼 분식이라도 폼 나게 먹으려는 새로운 세대의 요구일까. 소확행의 여파일까. 모르겠다. 다만, 한때의 유행이 아닐 것 같다는 데 동의한다. 여러분은 어떤가.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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