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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다, 고전] 프랑스 판 봉이 김선달의 여행법 “상상으로 떠나라”

입력
2019.05.17 04:40
수정
2019.05.21 17:2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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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작가들이 인정하는 산문가, 박연준 시인이 격주 금요일 <한국일보> 에 글을 씁니다.

<7>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내 방 여행하는 법’

1794년 출간 이후 후대 판본에 실린 베시에(M. Vessier)의 삽화. 평범한 방 안에서 한 남성이 책을 들어 보이고 있다. 반짝이는 책이 여행지로 낙점 받은 듯 하다. 유유 출판사 제공
1794년 출간 이후 후대 판본에 실린 베시에(M. Vessier)의 삽화. 평범한 방 안에서 한 남성이 책을 들어 보이고 있다. 반짝이는 책이 여행지로 낙점 받은 듯 하다. 유유 출판사 제공

“그러지 말고, 떠나자. 나와 함께 가자! 아픈 사랑과 무심한 우정에 홀로 방구석에 처박힌 그대여, 보잘것없는 헛된 세상사를 털어 버리고 떠나자!”(16쪽)

누군가 우리 앞에 와 이렇게 외친다면, 엉덩이가 들썩거리지 않겠는가. 나뭇잎은 세상을 삼킬 듯 푸르게 자라고, 햇빛도 제법 강렬해졌다. 꽃씨들조차 둥둥 떠서 안착할 곳을 찾아 헤매는데, 떠나야 한다! 그런데 어디로?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1763-1852)는 ‘내 방 여행하기’를 제안한다. 눈 감고도 다 아는 내 방으로 떠나라니, 제 정신인가. 여행이라면 일단 집에서 멀어지는 일 아닌가.

이 뻔뻔한 프랑스 작가는 “방에 죽치고 있는 이들 가운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소개하는 새로운 여행법을 거부할 이는 단 한 명도 없으리라”고 단언한다. 책을 읽으며 이 여행법에 솔깃했음을 고백한다. 언제 떠날지 고민할 필요도 없고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다소 허황된 얘기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유려하게 흐르는 그의 말솜씨와 인간적 매력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메스트르는 1790년 한 장교와 법으로 금지된 결투를 벌이고 42일 간 가택연금을 선고 받는다. 이 책은 가택연금 기간 중 자기 방에서 써 내려간 기록이다. 메스트르는 갇힌 신세라고 상심하지 않고, 특유의 모험심으로 발상의 전환을 꾀한다. 자기 방을 여행하는 여행자라니, 프랑스 판 봉이 김선달이 아닌가.

1794년 출간 이후 후대 판본에 실린 들로르(C.E. Delort)의 삽화. 한 남성이 의자에 기대 편한 자세로 잠을 청하고 있다. 유유 출판사 제공
1794년 출간 이후 후대 판본에 실린 들로르(C.E. Delort)의 삽화. 한 남성이 의자에 기대 편한 자세로 잠을 청하고 있다. 유유 출판사 제공

이 독특한 여행기에서 그는 인간의 영혼과 동물성(육체)을 구분해 말한다. “영혼이 몸이라는 물질의 족쇄에 벗어”나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일, 즉 정신의 탈출기다.

“책을 읽다가 갑자기 흥미로운 생각이 뇌리를 스치면 그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기계적으로 글자와 문장을 따라갈 뿐, 이미 책은 안중에도 없을 때가 있다. 무엇을 읽었는지도 모르고 방금 읽은 내용도 기억하지 못한 채 책장만 넘긴다. 당신의 영혼은 자신의 짝인 동물성에게 책을 읽으라고 명령은 해 놓은 채, 정작 자신은 딴생각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다.”(31쪽) 정신의 딴청, 홀로 멀리 다녀옴. 이것을 여행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침대, 형이상학, 벽에 걸린 그림들, 개와 하인, 편지, 여행용 외투(실내복), 마른 장미, 여인들, 서가… 등이 모두 여행지가 된다.

수잔 손택은 이 책을 “문학사상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거침이 없는 자전적 산문”이라고 했다. 진정으로 ‘독창적인 일’은 자발성에서 나오는데, 자발성은 심심함과 단짝이다. ‘심심함’은 창작의 열쇠다. 메스트르는 심심한 나머지(아마도),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내 방 여행하는 법’을 고안해 내기에 이른 것이 아닐까. 그는 상상의 힘으로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종일관 생기 넘치는 생각들, 웃음과 철학, 담백한 진실이 담긴 글에서 그의 영혼은 어린 아이처럼 반짝인다.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유유 출판사 제공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유유 출판사 제공

가택 연금에서 풀려나는 여행의 마지막 날, 그는 이렇게 쓴다. “그들은 내게 어떤 곳도 가지 못하도록 했다. 대신 그들은 내게 이 우주 전체를 남겨놓았다. (중략) 오늘 나는 자유다. 아니 다시 철창 안으로 들어간다. 일상의 멍에가 다시 나를 짓누를 것이다.”(184쪽) 가만히 한 곳에 앉아 온 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가 하면, 세계 곳곳을 누비면서도 제자리일 수 있다. 상상력과 관찰, 발견의 문제다. 상상력은 어떤 장애물도 갖지 않는다.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상상으로 여행하다 보면, 일상도 여행이 될 수 있다. 결국 뇌를 속이는 것, 아니 뇌를 설득하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어디로? 물론 ‘내 방’으로.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당신 맘이다. 낡은 의자, 책이 쌓인 책상, 보석함, 거울, 옛날 사진… 새로움은 언제나 ‘숨어’있다. 상상하는 눈이 그것을 찾아낸다. ‘내 방 여행하는 법’이 지도가 되어줄 것이다.

내 방 여행하는 법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지음ㆍ장석훈 올김

유유 발행ㆍ194쪽ㆍ1만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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