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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응급실에서 거는 전화

입력
2019.05.13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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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할아버지는 길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행인의 신고를 받고 119가 도착했다. 호흡과 맥박은 있었지만 의식이 없었으며 통증에 간신히 반응했다. 갑자기 발생한 뇌졸중으로 보였다. 할아버지가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의료진은 이 사실을 파악했다. 그는 기본적인 조치만 받은 뒤 즉시 CT 촬영실로 향했다. 모니터로 확인한 결과 심각한 뇌출혈이었다. 당장 어떤 조치라도 취하지 않으면 사망할 것 같았다.

그는 혼자 길에서 쓰러졌다. 보호자가 있어야 했지만, 병원이라고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지갑과 휴대폰을 뒤져야 한다. 다행히 지갑에 신분증이 들어 있어, 그의 이름과 나이를 전산으로 띄울 수 있었다. 이제 보호자에게 연락해야 했다. 신분을 안다고 보호자 연락처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휴대폰이 잠겨 있거나 망가지면 매우 곤란했다. 의식이 없는 환자의 손가락 지문으로 휴대폰 잠금을 푸는 일도 다반사다. 하지만 이번에도 다행히, 휴대폰이 잠겨 있지 않았다. 불과 몇 시간 전 그의 아내로 추정되는 통화가 있었다. 나는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노년의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는 약간 소란스러운 분위기였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즉시 용건을 전했다.

“저 혹시 ○씨와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아내입니다.”

당혹스러운 목소리였다.

“저는 ○대학병원 응급의학과 의사입니다. 지금 남편분이 길에서 쓰러졌습니다. 심각한 뇌출혈로 의식불명입니다. 지금으로는 사망 가능성도 높습니다. 수술을 진행해야 하니 보호자분 동의가 필요합니다. 이쪽으로 당장 오셔야 합니다.”

나는 내가 이 말을 하면서도, 흡사 보이스 피싱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급박스럽게 믿기 힘든 내용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은 내 말이 차라리 거짓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통화의 내용을 실제로 전해야 한다. 어디 모임에 참가하고 있었는지 수화기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상한데. 이거 보이스 피싱인지 뭔지 아녀?”

“그러니까, 끊고 남편한테 한 번 다시 전화해 봐.”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거짓이면 좋겠다고 바랄 정도의 내용이다. 심지어 전화하자마자 알 수 없는 신분을 대며 상대방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다. 경계심이 생길 테고, 당장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주변의 말을 들은 아내의 목소리가 넘어온다.

“저, 일단 끊고 다시 통화하면 안 될까요?”

“믿기 힘든 것 압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계좌를 부르거나 금품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남편분을 보러 오시라는 겁니다. 다른 곳이 아니라 대학병원 응급실입니다. 오시는 건 돈을 요구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결정적으로 지금 제가 걸고 있는 휴대폰이 남편분의 것입니다. 다시 걸어도 제가 받을 겁니다.”

이 말이 논리적이었던 것은, 내가 전하려는 말이 완벽히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주변의 목소리가 웅성거리다가 당혹스러움으로 바뀌었다. “진짜인가 봐.” “얼른 가 봐요.” 답하는 아내의 목소리는 완벽히 수긍한 듯했다. “어디라고요?” “○병원입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환자에게 돌아갔다. 수술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의식 상태는 나빠지고 있었다.

보호자가 도착했을 때 나는 안도감과 동시에 반갑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방금 전했던 몹쓸 소식을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경위와 상태를 설명했고, 이어지는 동안 아내는 구체적으로 절망적인 표정이 되어 갔다. 나는 이렇게 인생에 크게 남을 만한 나쁜 소식을 매일같이 전해야 했다. 심지어 악착같이 전화를 걸어서라도. 수술 전 잠깐의 면회 시간, 의식 없는 남편을 마주한 아내의 비명이 내 뒤에서 울려 퍼졌다. 그것이 내게, 절망적으로 익숙했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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