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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형에, 원색에… 103세 노장, 김병기의 캔버스는 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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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형에, 원색에… 103세 노장, 김병기의 캔버스는 젊다

입력
2019.04.16 04:4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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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기 화백, 3년 만에 ‘여기, 지금’ 개인전 

11일 오전 서울 가나아트센터에서 김병기 화백이 신작 '산의 동쪽-서사시'를 설명하고 있다. 신지후 기자
11일 오전 서울 가나아트센터에서 김병기 화백이 신작 '산의 동쪽-서사시'를 설명하고 있다. 신지후 기자

이 땅에 난 지 올해로 103년, 그러니까 한 세기를 지나고도 3년이 흘렀다.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나 16세 되는 해 붓을 잡았으니 작가 경력도 90년에 가깝다. ‘추상화가 1세대’라는, 한국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타이틀도 보유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캔버스 앞에 서서 또 다른 작품 세계를 궁리한다. 국내 최고령 현역 김병기 화백 이야기다.

김 화백을 최근 만나 ‘무엇이 당신을 움직이게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추상, 그리고 오브제를 넘어 다시 원초적 상태에 와 있습니다. 그 덕에 빈 캔버스가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느껴져요. 계속 포스트모더니즘을 하려고 해요. 나대로 동양성을 갖고서요.”

김 화백은 103세 생일인 이달 10일부터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 ‘여기, 지금’을 열고 있다. 평면 작품 약 20점이 나왔는데, 지난해와 올해에 그린 신작 10여점이 포함돼 있다. 김 화백은 “그림을 (겨우) 몇 점 내놓고 전람회(개인전)를 한다니 마음이 약해져 있다”면서도 “100세 넘어 전시를 하는 건 세계에 없는 일이라 한편으론 우월적인 생각도 교차한다”고 고백했다.

김병기 '다섯개의 감의 공간'. 가나아트센터 제공
김병기 '다섯개의 감의 공간'. 가나아트센터 제공

김 화백은 한국 서양화가 1세대인 김찬영(1893~1960)의 둘째 아들로, 1933년부터 일본 가와바타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이듬해엔 일본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에 들어가 추상 미술과 초현실주의 미술을 접했다. 1939년 한국으로 돌아와 ‘50년 미술협회’를 결성하고 왕성하게 활동했다. 1965년 미국으로 가 작품 세계를 넓혔고 70세가 넘은 나이에 국내로 돌아왔다. 이번 개인전은 2016년 이후 3년 만이다.

김 화백의 신작엔 역동성이 응집돼 있다. ‘메타포’(2018) ‘겨울감나무’(2018) 등 작품 중심을 채우는 선(線)들은 상수(上壽)를 넘어선 노장의 붓질로 나왔다고 보기 힘들 만큼 강하게 뻗어 있다.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굵은 흰 선은 긴장감을 유발하는데, 마스킹 테이프를 붙였다 떼는 방식으로 공간 분할과 여백을 표현했다. 미술계는 이 같은 김 화백의 선 표현 기법을 ‘촉지적 선묘’라 부른다. 선 자체의 촉각성과 회화로서의 시각성이 동시에 두드러지는 형태라는 뜻이다.

김병기 '산의 동쪽'. 가나아트 제공
김병기 '산의 동쪽'. 가나아트 제공

신작 곳곳에선 작품 세계를 끝없이 혁신하겠다는 태도가 보인다. ‘산의 동쪽’(2018) 등엔 이전 작품에선 쉽게 찾아볼 수 없던 삼각형, 사각형 등의 도형이 눈에 띈다. “서양의 몬드리안처럼 기하학적 형태를 표현하되, 선과 여백을 활용해 동양화의 정신도 빼놓지 않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흙색, 검정색을 선호했었지만, 신작 중에는 원색이 주를 이루는 작품들이 적지 않다. 최근작인 ‘산의 동쪽-서사시’는 작품의 3분의2가량이 샛노란색으로 채워져 있다. 그는 “색채에 대한 욕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며 “앞으로 얼마나 더 작업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아주 컬러풀한 작품을 해보겠다”고 했다.

김병기 화백의 서울 종로구 화실. 올해로 103세을 맞았지만, 여전히 그의 붓과 물감은 마를 날이 없다. 가나아트 제공
김병기 화백의 서울 종로구 화실. 올해로 103세을 맞았지만, 여전히 그의 붓과 물감은 마를 날이 없다. 가나아트 제공

김 화백은 최근 현대 미술의 흐름에는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마르셀 뒤샹을 롤 모델로 삼아 왔을 정도로 개념 미술에 천착해 왔지만, 최근 들어 철학이 조금 바뀌었다고 했다. “개념이 달라지는 건 좋지만 남는 건 변기와 TV 박스뿐이에요. 죽은 상어를 수족관에 넣고 작품화 하는 데미안 허스트의 작업도 반기지 않고요. 나도 뒤샹의 영향을 받았지만, 요새는 현대 미술의 허위성에 저항하는 나를 발견하고 있어요.” 100세를 넘긴 노장이지만 세상에 그저 익숙해지지만은 않겠다는 의지가 읽혔다.

스스로를 “장거리 선수”라고 정의한 김 화백은 ‘절충하지 않는 예술’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는 “예술에서 ‘1+1’의 답은 3도, 5도 될 수 있다. 2로 단정 짓는 건 절충에 불과하다”며 “노자가 무위, ‘0’의 세계를 이야기했듯 나도 무한한 가능성을 담은 미술의 세계를 오래도록 누리고 싶다”고 전했다. 전시는 5월 12일까지 열린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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