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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讀古典] 땅을 얻고 신용을 잃다(得原失信)

입력
2019.04.09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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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晉)나라 진수(陳壽, 233~297)가 쓴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에 살을 붙여 만든 작품이 소설 ‘삼국지연의’다. 줄여서 ‘삼국연의(三國演義)’라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빼고는, 대부분의 정사가 재미없듯이, ‘삼국지’도 소설이 훨씬 재미있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독자들이 말하는 ‘삼국지’는 십중팔구 ‘삼국연의’를 말하는 것이다. 삼국연의를 읽는 것도 좋지만, 정사 삼국지도 배송지(裴松之, 372~451)의 주(注)를 읽으면 소설 못지않게 재미가 쏠쏠하다. 정사에 없는 생생하고 다양한 기록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우리말에서 성어처럼 되어 버린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쫓다(死諸葛走生仲達)”도 배송지의 주에 나온 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명인의 감추어진 이야기가 궁금하기 마련이다. 그런 인물 중에는 당연히 제갈량(諸葛亮, 181~234)이 들어간다. 제갈공명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유는, ‘량(밝다)’이라는 이름에 맞추어 지은 자(字)가 ‘공명(孔明)’, 즉 ‘크게 밝다’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보이는 제갈량의 모습은 워낙 신출귀몰하고 병법에 달인이지만, 실제로는 적지 않은 비난과 부정적 평가도 있었다. 특히 북벌과 관련하여 보여준 작전 능력 및 판단 착오에 비판이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의 기록을 보면 제갈량을 걸출한 인물로 평가했던 여론은 일찍부터 형성된 듯하다. 삼국연의에서 제갈량 평생의 맞수는 사마의(司馬懿, 179~251)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랬다. 사마의는 자가 중달(仲達)이기에 사마중달이라 부른다. 두 사람의 우열에 대하여 배송지의 주는 오(吳)나라 사람 장엄(張儼)이 쓴 묵기(默記)를 인용하였다. 장엄의 요지는 ‘위(魏)나라 사마의는 뛰어난 자였지만 제갈량을 따라갈 수는 없다’이다. 제3국 사람의 견해이니 공정한 평가라 할 수 있다.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이 매번 사마의에게 밀린 것처럼 썼고, 진서(晉書) 본기(本紀)에서도 제갈량이 매번 졌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사료를 곧이 믿기는 어렵다. 모두 진나라 사람이 썼고 진나라 사료에 근거해 쓰였기 때문이다. 삼국연의 독자들이 주지하듯 사마중달의 손자가 진나라를 건국하지 않았는가.

유의경(劉義慶, 403~444)이 쓴 세설신어(世說新語)를 보자. 제갈 가문은 인재가 많았는지, 제갈량의 형 제갈근, 종제 제갈탄 모두 한 자리를 했던 인물인데 각자 다른 나라에 벼슬하였다.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이 “촉은 용을, 오는 호랑이를, 위는 개를 얻었다(蜀得其龍, 吳得其虎, 魏得其狗)”고 말했다고 한다. 용은 제갈량, 호랑이는 제갈근, 개는 제갈탄을 말한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개는 용맹을 뜻하지, 나쁜 뜻이 아니다. 물론 요새 말로 세 사람의 클래스가 다르다는 표현임은 분명하다.

제갈량은 화제의 인물인 만큼 많은 기록이 전해온다. 그중 배송지가 믿을 수 없다고 말한 제갈량의 일화가 있다. 231년 2월, 공명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중달의 30만 정예병과 맞붙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촉한의 군사 2할이 귀향할 시기였다. 위나라의 전력이 대단한데 8만으로 30만에 맞서게 되었으니 낭패였다. 제갈량의 참모들이 병력 교체를 한 달만 미루자고 건의했다. 제갈량이 말했다. “나는 군사를 이끌고 싸울 때, 신용을 근본으로 삼는다. 옛 사람이 ‘득원실신(得原失信)’을 중시하였다. 집에 돌아갈 병사들은 이미 행장을 꾸리고 날짜만 기다릴 것이고 처자식들은 학수고대하며 날짜만 세고 있을 것이다. 어려운 싸움이 되겠지만 도리상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군사들에게 빨리 귀향하라고 재촉하였다.

‘득원실신’이란 말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고사다. BC635년 진문공(晉文公)은 3일 치의 식량을 가지고 원나라를 공격하면서 3일 내에 이기지 못하면 철수하기로 했다. 사흘이 되어도 원나라가 항복하지 않자 진문공은 철군을 명령했다. 이때 첩자가 와서 말했다. 원나라가 항복하려고 한다고. 참모들이 진문공에게 좀 더 기다리자고 요청하자, 진문공이 말한다. “신용은 나라를 유지하는 보배이며 그것으로 백성을 지킬 수 있다. 원나라를 얻고 신용을 잃으면 어떻게 백성을 지키겠는가. 잃는 것이 더 많을 뿐이다.”

촉한의 병사들은 제갈량의 결정에 감동했다. 떠나야 할 군사들은 남아서 일전을 치르겠다고 하고, 남았던 군사들도 투지가 끓어올라 결사전을 각오했다. 이구동성으로 “승상의 은혜를 죽어도 갚을 수 없다.”고 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자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적을 공격하니 한 사람이 열 명의 적을 감당했다. 결과 위나라 장수 장합이 죽고 총지휘관 사마의는 퇴각했다. 한 번 싸워 이런 대승을 거둔 것은 ‘신(信)’에서 비롯된 것이다.

‘춘추좌씨전’은 진문공이 30리를 물러나자, 원나라가 항복했다고 썼다. 한비자는 진문공이 신용을 지켰기 때문에 원나라가 스스로 항복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제갈량은 정말 무슨 생각에서 군사들에게 돌아가라고 했을까. 만약 기록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박성진 서울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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