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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다, 고전] 작고 가녀린… 모든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눈물을 부른다

입력
2019.04.04 14:00
수정
2019.04.04 21:44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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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작가들이 인정하는 산문가, 박연준 시인이 격주 금요일 <한국일보> 에 글을 씁니다.

<4>박용래 시전집 ‘먼 바다’

한국일보 그래픽팀.
한국일보 그래픽팀.

박용래 시전집 ‘먼 바다’는 우리집 ‘혼돈의 서재’에서 사라지지 말라고, 보물처럼 챙겨두는 책이다. 애써 챙겨둔 보람도 없이 이 시집은 자꾸 사라진다. 찾아보면 남편 책상 위에 숨어있다. 다시 들고 와 내 책상에 올려 두면, 또 사라진다! “왜 자꾸 가져가는 거야?” 물으니, “요새 눈물이 없어져서”라고 답한다. 그렇다. 눈물이 마른 사람들이여, 주목하라. 여기 ‘눈물의 시인’이 있으니, 그는 진짜배기다!

박용래(1925~1980). 우는 사람. 봄엔 봄이라서, 겨울엔 겨울이라서, 비 오면 비가 와서, 밤이면 밤이라서 우는 사람.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고, 여린 것은 가엾다고 우는 사람. 이런 사람이 어디 있냐고? 여기 있다. 사진을 보면 그의 얼굴도 ‘눈물 형’으로 보여 슬며시 웃음이 난다. 소설가 이문구는 생전에 “울지 않던 그를 두 번밖에 못 보았”노라고 말했다. “박시인은 눈물이 많았다. 그렇게 불러도 된다면 가히 눈물의 시인이 그였다. (중략)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그의 눈물을 불렀다. 갸륵한 것, 어여쁜 것, 소박한 것, 조촐한 것, 조용한 것, 알뜰한 것, 인간의 손을 안 탄 것, 문명의 때가 아니 묻은 것, 임자가 없는 것,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 갓 태어난 것, 저절로 묵은 것……”(235쪽, 발문)

나는 무조건 눈물이 많은 사람의 편이다. “그거 병이여.” 누군가 핀잔을 준대도 뭐 어때? 눈물이 많은 건 사랑이 많다는 뜻! 나이가 들면 눈물도 마른다. 박용래의 ‘눈물 관련 일화(차고 넘친다)’를 읽거나, 뾰족한 비석처럼 절도 있게 세운 그의 시들을 읽는 걸로 눈물을 대신하는 날이 더 많다.

시인 박용래(1925~1980). ‘먼 바다’는 고 박용래 시인 생전의 모든 시작품을 총결산한 시전집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시인 박용래(1925~1980). ‘먼 바다’는 고 박용래 시인 생전의 모든 시작품을 총결산한 시전집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하지만 그는 시에서만은 아껴 운다. 감정이나 언어를 낭비하는 법 없다. 삼엄하다. 가령 이런 식이다.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그 봄비’ 전문.

그는 늘 작고 가녀린 것들을 썼다. 달, 홍시, 강설, 홍래 누나, 앵두꽃, 우렁 껍질, 시락죽, 보리깜부기, 싸락눈, 엉겅퀴, 모과차, 가을 빗소리, 섬돌, 삼동, 두멧집…. 봄바람도 그에게 붙들리면 그냥 불어가지 못한다. “봄바람 속에 종이 울리나니/ 꽃잎이 지나니// (…) 옛날도 지나니”(‘종소리’) 라고 노래했다.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시인의 시선을 공유하고, 그의 ‘말소리’를 듣는다. 시의 문자들은 소리가 되기 위해 기다리는 언어다. ‘저녁눈’을 소리 내어 읽어보자.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은 고요하고 낮은 곳, 사람 눈길이 덜 닿는 곳을 찾아 붐빈다니! 이 짧은 시 한 편이 순식간에 우리를 눈발 붐비는 “어느 변두리 빈터”로 데려다 놓는다.

먼 바다

박용래 지음

창작과비평사 발행•277쪽•8,000원

시가 본래 ‘짧고도 충분한’ 거라면, 박용래 시는 ‘시의 정수(精髓)’다. 덜고 덜어낸 뒤, 가장 마지막에 남은 무엇! ‘먼 바다’는 ‘시전집(詩全集)’이다. 생전에 쓴 걸 다 모은 것이라면 두꺼운 책이라고 상상할 텐데, 이 전집은 얇다. 그가 워낙 과작인데다 짧은 시를 주로 썼기 때문이다. ‘가벼운 것들의 혼’으로만 채워져 있어 깊고 무거워진 책이다. 그는 우리말을 ‘아껴’ 썼다. 당나귀 등의 매끄러운 갈기처럼 조르륵, 어여쁘게 놓아두었는지! 울적한데 눈물도 잘 안 나오는 밤, 이 시집을 읽노라면… 호롱불 안에 심장을 걸어둔 듯, 마음이 환해진다.

봄밤엔 먼 데에 두고 온 바다를 생각하며, ‘먼 바다’를 읽는 게 좋다. “앵두꽃 피면/ 앵두바람/ 살구꽃 피면/ 살구바람” 분다고 노래한 시를, 나는 ‘후루룩’ 읽는 게 안 되어 자꾸 느려진다. 조금 읽다 내려놓고, 조금 읽다 한숨 짓고, 그러다 보면 일도 없이 눈물이, 오기도 한다.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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