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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속편은 새로 만들어져야 한다

입력
2019.04.04 04:40
수정
2019.04.04 16:45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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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극작가 루카스 네이스가 쓴 ‘인형의 집 Part 2’가 한국 초연된다는 기사를 보았다. (양진하 기자, ‘집 나갔던 노라, 알파걸로 다시 돌아왔지만…’ 2019.4.2) 1879년 초연된 입센의 ‘인형의 집’은 여러 장르에서 무수한 후일담을 낳았는데, 이 작품이 숱한 파생 작품을 낳은 근원은 하나다. “집을 나간 노라는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루쉰은 1923년 12월16일, 북경여자고등사범학교에서 ‘노라는 떠난 후 어떻게 되었는가’(‘무덤’, 선학사, 2001)라는 제하의 강연에서, 집을 떠난 노라에게는 단 두 가지 길 밖에 없다고 말한다. 첫째는 몸을 파는 것, 둘째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 그리고 짓궂게 이렇게 덧붙였다. “또 하나의 길이 있는데, 바로 굶어 죽는 것입니다.” 여자가 취직할 곳이 없는 현실을 잘 알고 있었던 루쉰은 그래서 집을 나가기보다 집에서 “묵묵하고 끈기 있는 투쟁”을 하는 게 더 낫다고 충고한다. 채만식이 1933년 발표한 장편소설 ‘인형의 집을 나와서’(창작사, 1987)와, 오스트리아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엘프리데 옐리넥이 1978년에 발표한 희곡 ‘노라가 남편을 떠난 후 일어난 일 또는 사회의 지주’(성균관대학교 출판부,2003)에 나오는 두 명의 노라 또한 타락과 기아의 경계를 모두 밟고 있었다.

“집을 나간 노라는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세간의 관심은 주부가 세 아이를 내팽개치고 집을 떠난 ‘인형의 집’의 결말이 충격적이었던 데다가, 가정을 버린 여자가 경제적ㆍ사회적으로 독립하는 일이 신기루와 같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인형의 집 Part 2’와 같은 작품이 계속 양산되는 것은 ‘인형의 집’이 편향적으로 독해되어 왔기 때문이다. 노라는 ‘인형의 집’의 독점적인 주인공이 아닐뿐더러, ‘인형의 집’은 노라의 자각이 작품의 중심에 놓인 페미니즘 연극이 결코 아니다. ‘시나리오 속의 시나리오’(시공사, 2002)를 쓴 밴 브래디와 랜스 리는 관객들에게 충격을 준 노라의 가출(자각)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 장면이라고 혹평한다. 그들의 말이 맞다.

‘인형의 집’에는 페미니즘만으로 조감되지 않는 더 큰 전모가 있다. 노라의 남편 헬메르는 결혼 초기에 결핵에 걸려 죽게 되었으면서도 치료비를 융자하자는 아내의 제안을 물리친다. 빚이 자신의 사회적 체면을 깎아내릴 것이라고 조바심치는 그는 오히려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노라는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하여 은행의 돈을 빌리게 되고, 그 돈으로 남편을 살린다. 그녀의 범법을 눈치 챈 은행 대출 담당 크로그스타트는 그것으로 노라를 협박한다. 극의 끄트머리에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헬메르는 노라의 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평판(신용)에 먹칠을 한 아내를 격렬하게 규탄한다. 노라는 8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끝장내기로 하고 짐을 싼다.

이 작품은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 양일간을 무대로 한다. 그 이틀간 헬메르는 서재에서 쉬지 않고 일을 하며, 아내에게 번번이 절약을 강조한다. 근면ㆍ금욕(절약)ㆍ신용은 헬메르의 성부ㆍ성자ㆍ성령이다. 크리스마스가 배경이지만 헬메르가 하느님을 찬양하는 대목은 없다. 까닭은 종교적 신앙의 세속적 전이와 관련 있다. 종교적 신앙의 세속적 전이란 종교적 신앙이 자본주의 정신(근면ㆍ금욕ㆍ신용)으로 변한 다음, 최후로는 자본주의 정신이 종교가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상극이었던 종교와 자본주의 사이에 대립물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첫 권을 낸 때가 1867년이었으니 헬메르처럼 강박적인 인물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쉽게 납득된다. 작중의 그는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은행 총재로 설정되어 있다.

이제껏 ‘인형의 집’은 ‘주체적 여성’의 탄생이라는 지도 아래서만 읽히고 해석되어 왔다. 이제는 ‘자본주의형 인간’의 탄생에도 주목하자. 인형의 집의 수인에는 노라만 아니라, 헬메르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은 “여성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었다”(알도 켈, ‘입센’, 생각의 나무, 2009)라던 입센의 주장에도 귀 기울이자. 연극인들의 새로운 독해와 도전을 고대한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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