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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생태II] 식물들이 들려주는 기후변화 이야기

입력
2019.03.23 04:4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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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위기 식물인 암매는 빙하기의 우리나라가 매우 추운 곳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잔존종이다. 주로 러시아 사할린, 미국의 알래스카 등 툰드라 지역에 분포하는데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한라산 백록담 주변의 절벽부에서 소수개체가 살고 있다.
멸종위기 식물인 암매는 빙하기의 우리나라가 매우 추운 곳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잔존종이다. 주로 러시아 사할린, 미국의 알래스카 등 툰드라 지역에 분포하는데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한라산 백록담 주변의 절벽부에서 소수개체가 살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 재해를 지혜롭게 대비하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해류의 온도나 이동, 태양의 활동 등을 분석해 미래 기후를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의 기후는 태양, 대기, 해수 및 생물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긴 시간을 두고 변화하기 때문에 단편적인 자료에 의해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과거에 지구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기후변화의 역사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기후변화의 증거는 땅속의 화석, 빙하 속의 공기, 해안가 절벽의 파식대 등 지구의 다양한 장소에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는 현재 자생하는 다양한 식물을 통해 과거 기후변화의 흔적을 찾아봅니다.

 ◇잔존종을 보면 과거 식물 분포가이 보여요 

식물학 분야의 경우, 수명이 긴 나무의 나이테 간격을 분석하거나 토양층에 퇴적돼 있는 꽃가루나 포자를 활용해 과거의 기후를 추론합니다. 또 특수한 장소에 고립돼 있는 기후적 잔존종(또는 잔존집단)의 분포를 통해 과거의 식물 분포를 복원하기도 합니다. 사전적인 의미로서 잔존종은 과거에 크게 번성했지만 지금은 일부 지역에서만 제한적으로 살고 있는 생물종을 말합니다. 잔존종의 분포가 과거 식생대와 기후를 알려 주는 증거가 되는 이유는 기온이나 강수량과 같은 기후가 식물의 생존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기후의 변화에 따라 식물은 이동과 고립, 소멸을 반복해 왔으며, 그 과정에서 형태가 변화하는 진화를 하기도 하고, 저마다 다른 고유한 생태적인 특징을 갖게 됩니다. 변화된 기후에 적합한 생태적 특징을 가진 식물들은 분포 면적이 넓어지지만, 그 반대의 식물들은 분포 면적이 줄어들거나 소멸하게 됩니다. 빙하기처럼 추운 기후에는 북쪽의 한대성 식물들이 남쪽으로 확장을 하고, 기후가 온난해지면 남쪽지역에 분포하는 식물들이 북쪽으로 다시 이동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대성 침엽수인 지리산의 가문비나무에 열매가 매달려 있다.
한대성 침엽수인 지리산의 가문비나무에 열매가 매달려 있다.

마지막 빙하기 이후 현재까지 약 1만년 동안 한반도는 수 차례에 걸쳐 식생대가 변화해 왔습니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면서 가문비나무, 분비나무, 종비나무와 같은 한대성 침엽수로 덮여 있던 한반도의 숲은 빠른 속도로 신갈나무 등이 우위를 점하는 낙엽 활엽수림으로 변화했습니다. 그리고 고온다습한 환경이 지속되면서 난온대 또는 아열대에서 자라는 상록활엽수들이 한반도 내륙까지 확장했습니다. 그 후 다시 한랭건조한 기후로 변화하면서 상록활엽수들은 현재의 남쪽 도서지방이나 제주도로 후퇴하게 됩니다. 식생대가 변화는 과정에서 북쪽이나 남쪽으로 이동하지 않고 긴 시간 동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을 찾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장소를 ‘피난처(Refugia)’라고 합니다.

설악산에서 만날 수 있는 눈잣나무는 몽골, 일본 북부, 시베리아 등에 분포하는 한대성 식물로 설악산의 눈잣나무 자생지는 지구상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설악산에서 만날 수 있는 눈잣나무는 몽골, 일본 북부, 시베리아 등에 분포하는 한대성 식물로 설악산의 눈잣나무 자생지는 지구상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한라산은 북방계 식물의 귀한 피난처 

한반도에는 아고산지대, 석회암지대, 얼음골, 고층습지 등과 같은 다양한 피난처가 분포합니다. 피난처의 수만큼이나 많은 종류의 잔존종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곳에 잔존해 있는 식물의 대부분은 빙하기 식물로 알려져 있는 북방계 식물입니다. 빙하기의 우리나라가 매우 추운 곳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한반도는 지리산, 덕유산, 설악산과 같은 다수의 아고산대 산지들로 구성된 백두대간이 남북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아고산대는 해발고도 1,500~2,500미터의 지대로 고산대와 저산대의 사이에 있으며, 저온 건조하고 침엽수가 많은 것이 특징입니다.

백두대간 밑으로도 제주도의 중심에 한라산이라는 해발고도 1,950m의 큰 산이 있습니다. 빙하기에는 북쪽에서 남하한 북방계 식물들이 낮은 지대에도 분포했지만 빙하가 물러가면서 이들도 수평적으로는 북쪽으로, 수직적으로는 산지의 높은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높은 산의 정상부에 고립돼 있는 북방계 식물은 과거 한반도가 주빙하기후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려주는 증거로 인정됩니다.

북방계 식물인 백두산의 월귤 열매. 해발고도가 500m 정도밖에 되지 않는 홍천얼음골에서 최근 고산식물인 월귤이 발견되면서 북방계 식물의 피난처인 얼음골의 중요성이 식물학계에서 주목 받고 있다.
북방계 식물인 백두산의 월귤 열매. 해발고도가 500m 정도밖에 되지 않는 홍천얼음골에서 최근 고산식물인 월귤이 발견되면서 북방계 식물의 피난처인 얼음골의 중요성이 식물학계에서 주목 받고 있다.

아고산지대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빙하기 식물은 설악산의 눈잣나무, 들쭉나무, 홍월귤, 지리산의 가문비나무와 한라산의 암매, 시로미 등입니다. 눈잣나무는 세계적으로 몽골, 일본의 북부, 시베리아 등에 분포하는 한대성 식물입니다. 설악산의 눈잣나무 자생지는 지구상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높습니다. 홍월귤은 툰드라 지역에서 자라는 키 작은 나무로서 백두산에서도 해발고도 2,000m 이상의 수목한계선 위쪽으로 자라며,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설악산 정상부의 바위지대에서 소수개체가 자라고 있습니다.

가문비나무는 국내에서는 지리산, 소백산, 덕유산, 계방산의 정상부 또는 능선부에서만 발견되는 한대성 침엽수입니다. 세계적으로는 러시아 동부, 중국 동북부, 일본의 고지대에서 자랍니다. 멸종위기 식물인 암매는 일본의 홋카이도, 러시아의 사할린, 캄차카, 미국의 알래스카 등의 툰드라 지역에 분포하며,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한라산 백록담 주변의 절벽부에서 소수개체가 살고 있습니다.

지리산의 가문비나무. 국내에선 지리산, 소백산, 덕유산, 계방산의 정상부 또는 능선부에서만 발견되는 한대성 침엽수다.
지리산의 가문비나무. 국내에선 지리산, 소백산, 덕유산, 계방산의 정상부 또는 능선부에서만 발견되는 한대성 침엽수다.

 ◇얼음골, 석회암지대, 고층습지에서 만나는 희귀 북방계 식물들 

낮은 지대이지만 여름철 차가운 바람이 뿜어져 나와 저온환경을 만들어 내는 얼음골에도 북방계 식물들이 피난해 있습니다. 해발고도가 500m 정도밖에 되지 않는 홍천얼음골에서 최근 고산식물인 월귤이 발견되면서 북방계 식물의 피난처인 얼음골의 중요성이 식물학계에서 주목받게 됐습니다. 홍천얼음골의 월귤은 찬바람이 불어나오는 바위틈 주변에서 안정적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두메고사리, 좀다람쥐꼬리, 한들고사리와 같은 북방계 양치식물들은 국내에서는 얼음골에서만 자랍니다.

또 토양에 다량의 칼슘이온과 탄산이온을 함유한 석회암지대에도 많은 수의 북방계 식물들이 고립돼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석회암지대의 토양은 매우 건조합니다. 건조한 환경에 강하지 않은 식물은 제대로 자랄 수가 없을 정도지요. 다르게 표현하면 건조에 강한 식물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한 피난처라 말할 수 있습니다. 나도범의귀, 몽고뽕나무, 삼수개미자리 등 무려 50종류 이상의 북방계 식물들이 국내에서는 석회암지대에서만 관찰됩니다. 나도범의귀는 백두산의 침엽수림 아래 이끼 틈에서 자라는데, 최근 강원도 석회암지대의 샘터 가장자리에서도 자라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백두산에 핀 나도범의귀 꽃. 북방계 식물인 나도범의귀는 국내에서 석회암지대에서만 관찰된다. 백두산의 침엽수림 아래 이끼 틈에서 자라는데, 최근 강원도 석회암지대의 샘터 가장자리에서도 자라는 것이 확인됐다.
백두산에 핀 나도범의귀 꽃. 북방계 식물인 나도범의귀는 국내에서 석회암지대에서만 관찰된다. 백두산의 침엽수림 아래 이끼 틈에서 자라는데, 최근 강원도 석회암지대의 샘터 가장자리에서도 자라는 것이 확인됐다.

높은 지역에 있는 고층습지는 한대성 습지식물에게 생존을 이어갈 수 있는 피난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곳이 강원도 인제군 대암산의 해발고도 1,280m에 형성된 용늪입니다. 용늪은 1977년 국내 최초로 람사르 습지보호지역으로 등록됐으며 다수의 희귀 습지식물을 포함해 총 320여종의 식물이 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개통발, 대암사초, 비로용담, 물지채 등 10종은 국내에서 대암산의 용늪에서만 자라고 있습니다. 모두 빙하기에 남하했다가 현재는 용늪을 피난처 삼아 살고 있는 북방계 습지식물들입니다.

 ◇한반도가 지금보다 더 따뜻했던 적이 있었다고? 

사는 장소는 다르지만 얼음골, 석회암지대, 고층습지 등에서 분포하는 북방계 식물들은 과거에 한반도가 자신들이 내려와 살 수 있을 정도로 추운 곳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빙하기 이후 한반도에 지금보다 더 따뜻했던 시기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식물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남방계 식물인 히어리가 그렇습니다.

한반도가 지금보다 따뜻한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남방계 식물 히어리 수형.
한반도가 지금보다 따뜻한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남방계 식물 히어리 수형.

히어리는 세계적으로 한반도에만 사는 우리나라 고유종입니다. 한때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돼 보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히어리의 분포는 식물학자들 사이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와 같습니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의 일부 지역에만 분포하는데, 이들 지역과 멀리 떨어진 강원도의 화천군 백운산, 강릉시 망덕봉에도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기하게도 그 중간 지역인 충청도와 경북 그리고 다른 강원도 지역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히어리는 생태적 특징상 무리를 지으며 이동을 합니다. 이를 미뤄 보면, 과거 특정 시기에 남쪽에서 강원도까지 집단을 이루며 이동을 했다가, 어떠한 원인으로 다른 지역의 히어리는 모두 소멸하고 강원도의 두 집단만이 살아남은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경남 진주에서 발견된 히어리 꽃.
경남 진주에서 발견된 히어리 꽃.

산지 능선, 바위지대나 절벽부 등 다른 식물과의 경쟁이 적은 곳에서 자라는 히어리는 햇볕을 선호하는 식물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햇볕은 좋아하지만 건조한 곳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특성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히어리가 생태적으로 생존에 매우 취약하다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햇볕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육지식물들은 건조한 환경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진화를 합니다. 그러나 히어리는 건조한 지역에서 성목으로 자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현재 히어리가 분포하고 있는 지역은 강수량이 매우 많은 곳들입니다. 연평균 1,400㎜ 이상의 비가 내리는 곳이 히어리가 살 수 있는 피난처입니다. 이처럼 현재의 환경에서는 히어리가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곳이 지리산 일대와 강원도의 소수 지역이지만, 생존 능력이 취약한 히어리도 과거 한때에는 중부지방까지 번성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식물은 자신이 가진 생태적인 특징에 적합한 환경에서는 어떤 식물보다도 강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햇볕은 좋아하고 건조한 곳을 싫어하는 남방계 식물인 히어리에게 가장 생존력이 높았던 시기는 언제였을까요? 당연히 한반도가 숲을 이루기 전인 고온다습한 기후였을 때일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는 한반도에서는 기후최적기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빙하가 물러가기 시작한 1만년 전부터 한반도가 숲으로 덮이기 전인 초기 기후최적기(1만~8,000년 전)가 히어리에게는 가장 살기 좋았던, 가장 생존 경쟁력이 높았던 시기였습니다. 이때에 생장속도가 빠른 히어리는 개척자 식물로서 중부 내륙지방까지 집단을 이루며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인천 무의도에서 발견된 소사나무 열매.
인천 무의도에서 발견된 소사나무 열매.

 ◇식물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면 과거와 미래가 보여요 

히어리와 비슷한 분포 특성을 가지고 있는 식물들이 여럿 있습니다. 생울타리용으로 흔히 식재하고 있는 회양목과 분재 소재로 유명한 소사나무, 그리고 ‘수달래’라고도 불리는 산철쭉입니다. 이들 남방계 식물의 분포 역시 매우 특이합니다. 소사나무는 서남쪽 해안에서는 비교적 흔히 분포하지만, 불과 십여㎞만 내륙으로 들어오면 분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서남해안에서 100㎞이상 떨어진 강원도의 석회암지대에서 큰 무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식생경쟁을 극도로 싫어하는 양지식물인 소사나무 역시, 히어리처럼 한반도가 극상림(숲의 천이과정 중 생태계가 기후조건에 맞게 성숙되고 안정화된 숲의 마지막 단계)으로 덮이기 이전에 한반도 전역으로 이동했을 것입니다. 아열대 또는 온대 수종들이 자리 잡은 산림지대는 소사나무와 같은 양지식물에게는 지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잔존종이 들려주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가 몰랐던 과거의 기후환경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 식물의 분포나 우리 주변의 환경이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를 예측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글ㆍ사진=김진석 국립생물자원관 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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