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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선, 워코노미] 자본주의 반대하는 중국과 베트남 왜 서로 총을 겨눴나

입력
2019.03.23 10:00
수정
2019.03.25 18:45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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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7일 간의 중국-베트남 전쟁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귀결로 보입니다. 허나 미국의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저자가 격주 토요일마다 ‘또 다른 시선, 워코노미’를 연재합니다.

1979년 중국-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 포병대가 중국 접경 지역인 랑선에서 중공군 진지를 포격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9년 중국-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 포병대가 중국 접경 지역인 랑선에서 중공군 진지를 포격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9년 2월17일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베트남 국경을 넘어 공격을 개시했다. 공격에 동원된 중국군 병력 약 60만 명은 크게 두 부대로 나뉘었다. 각 부대는 베트남의 북동과 북서지역을 목표로 했다.

베트남과 중국은 전쟁 발발 1년 전인 1978년에 국경분쟁을 겪었다. 중국은 베트남이 700번 이상 무력도발을 해왔다고 주장했고, 베트남은 중국이 자국 영토를 2,000번 이상 침입했다고 항의했다. 1978년 한 해 동안 양국의 무력충돌로 인한 사상자는 수백 명에 달했지만 전면전으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반면 이날의 중국군 월경은 우발적인 충돌이 아니라 준비된 침공이었다. 본격적인 전쟁이었다.

◇공산권을 당혹하게 한 충돌

사실 이들 두 나라의 전쟁은 이상한 일이었다. 중국과 베트남은 둘 다 공산국가였다. 공산당이 독재하는 공산국가는 무산계급, 즉 프롤레타리아가 주인이었다. 부르주아에게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조국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만국의 노동자는 서로 단결하여 자본가의 지배를 뒤엎어야 했다. 그런 공산국가 사이에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알고 보면 공산국가 사이의 무력충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1969년 3월2일 우수리강의 다만스키섬에 주둔한 소련군 경비대를 중국군이 기습 공격해 전멸시키고 섬을 점령했다. 소련군은 곧바로 전차, 헬기, 다연장로켓포 등을 동원해 섬을 탈환했다. 소련과 중국 양국은 핵전쟁 직전까지 갔다가 같은 해 9월10일에야 겨우 사격중지 명령을 내렸다.

1977년 4월30일에는 중국과 친한 캄보디아가 베트남을 공격했다.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베트남은 1978년 크리스마스에 캄보디아를 전면 침공했다. 중국의 베트남 침공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한 보복이자 베트남을 양면전쟁(2개 이상의 전선이 형성된 전쟁)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였다.

중국과 베트남은 오랜 대결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중국 관점에서 고구려 등이 동쪽의 오랑캐, 동이(東夷)였듯이 베트남은 남쪽의 오랑캐, 남만(南蠻)이었다. 중국을 둘러싼 4대 이민족,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은 아무리 정복해도 굴복하지 않는 끈질긴 민족이었다. 원의 공격을 세 차례나 물리친 베트남 장군 쩐 흥 다오는 한국으로 치면 강감찬과 이순신에 해당했다.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친 베트남인들은 전쟁이란 단어를 접하면 먼저 중국을 떠올렸다. 베트남에게 중국은 글자 그대로 숙적이었다.

◇십자군전쟁도 결국 돈 때문?

경제적 목적은 분명히 전쟁을 일으키는 한 가지 이유였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내전인 남북전쟁이었다. 농업을 주로 하는 남부에게 노예제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기반 조건이었다. 반면 북부의 입장은 전혀 딴판이었다. 제조업이 성했던 북부는 공장에서 일할 노동자와 물건을 사줄 소비자가 많을수록 좋았다. 남부의 노예는 북부의 노동자 겸 소비자가 되어줄 좋은 후보였다. 만 4년 넘게 서로 잔인하게 싸운 이 전쟁에서 양측 합쳐 10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났다.

식민지를 둘러싼 일련의 제국주의적 전쟁도 경제적 요인이 크다. 1898년 쿠바 아바나에 정박해있던 미국 해군 중순양함 메인이 원인 불명의 폭발로 침몰하자 미국은 스페인에게 원인을 돌리고 전쟁에 돌입했다. 필리핀의 스페인함대가 미국 해군에 의해 격멸되자 오랫동안 스페인을 상대로 무장항전을 펼친 필리핀인들은 독립국가를 선포했다. 미국은 필리핀의 독립을 무시하고는 이번엔 필리핀과의 전쟁을 개시했다. 공식적인 미국-필리핀 전쟁은 약 3년 반 만에 미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일부 지역에서 필리핀인의 저항은 1913년까지 이어졌다.

자본주의적 세계관이 유일한 가치체계로 격상되면서 전쟁의 원인을 경제적 관점으로만 이해하는 일이 유행처럼 퍼졌다. 가장 극단적인 예는 중세의 십자군전쟁에 대한 경제적 재해석이었다. 1095년부터 1291년까지 200년 가까이 계속된 십자군전쟁은 로마가톨릭교회를 구심점으로 하는 서구세력과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세력 간의 전쟁이었다. 경제지상주의를 따르는 역사가에 의하면 십자군전쟁조차 경제적 동기가 전쟁의 궁극적 이유였다. 큰 아들만 영지를 세습하는 서구봉건제 하에서 까딱하면 빈민으로 전락할 작은 아들들에게 신규 영지가 필요했다는 설명이었다.

중국과 동남아 국가들의 해양 영유권 갈등이 한창이던 2011년 6월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시민들이 중국군의 베트남 동해(남중국해)상 조업 어선에 대한 위협 사격에 항의하며 시위하고 있다. 베트남은 남만(남쪽의 오랑캐)이라 불리며 중국과 오랜 갈등을 빚어왔다. 하노이=AP 연합뉴스
중국과 동남아 국가들의 해양 영유권 갈등이 한창이던 2011년 6월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시민들이 중국군의 베트남 동해(남중국해)상 조업 어선에 대한 위협 사격에 항의하며 시위하고 있다. 베트남은 남만(남쪽의 오랑캐)이라 불리며 중국과 오랜 갈등을 빚어왔다. 하노이=AP 연합뉴스

◇어떤 전쟁은 기억에서 촉발된다

경제적 요인이 전쟁 발발의 한 가지 원인인 것은 사실이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라는 주장은 과하다. 종교적 갈등은 여러 전쟁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해왔다. 가령 프랑스의 이른바 위그노전쟁은 구교도와 신교도 사이의 전형적인 종교전쟁이었다. 1562년 3월1일 바시에서 기즈 공작 프란시스의 구교도 부대가 칼뱅파 신교도를 칭하는 위그노들의 예배당을 습격해 몰살시켰다. 이에 분격한 부르봉의 루이 1세는 위그노 부대를 동원해 오를레앙을 점령했다. 위그노전쟁은 1598년 낭트칙령이 선포될 때까지 30년 넘게 계속됐다.

전쟁은 우발적인 원인에 의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쪽의 대표적 사례는 이른바 축구전쟁이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지역예선 4강전에서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가 맞붙었다. 홈경기에서 1승씩 거둔 두 나라는 1969년 6월27일 멕시코시티에서 3차전을 치렀고 연장전까지 간 혈투 끝에 엘살바도르가 3대2로 신승했다. 경기를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상한 엘살바도르는 7월14일 공군과 육군을 동원해 온두라스를 침공했다. 양국의 공군 편대는 모두 2차대전 때의 미국 프로펠러 전투기 P-51 머스탱과 F4U 코르세어로 구성되었다. 7월17일에는 온두라스 코르세어 2기가 엘살바도르의 머스탱 2기, 코르세어 2기와 차례로 공중전을 벌여 각각 1기씩 격추했다. 축구전쟁은 7월18일에 종료됐다.

전쟁은 국내정치적 목적에 의해 벌어지기도 한다. 1976년에 정권을 쥔 아르헨티나 군부는 1981년부터 시민세력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1982년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1840년 이래로 영국인들이 거주해온 남대서양의 몇 개 섬을 무력으로 기습 점령했다. 애국주의적 감정에 호소해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고 자신들에 대한 지지도를 끌어올리려는 의도였다.

또 적지 않은 전쟁은 과거에 흘린 피에 대한 서로의 기억 때문에 발생한다. 이런 쪽의 최근 경우는 인도-파키스탄 전쟁이다. 영국의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한 순간부터 인도와 파키스탄의 관계는 꼬여있었다. 이슬람교의 파키스탄과 힌두교의 인도로 나눈다는 계획은 지도상으로는 완벽했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았다. 1947년 카슈미르 지방의 편입을 놓고 두 나라는 첫 번째 전쟁을 치렀다. 파키스탄이 인도 지배 하의 카슈미르 반군을 계속 부추기자 1965년 인도군은 파키스탄을 전면 침공했다. 1971년에는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놓고 3차로 대결해 결국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독립했다. 1999년에는 카슈미르 카길 지구에 파키스탄군이 침입하면서 4차 전쟁을 벌였다. 가장 최근의 충돌은 올해 2월27일의 공중전으로서 각각 1기씩 전투기를 잃었다. 비공식 핵보유국인 두 나라의 충돌은 언제든지 핵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다.

◇중국을 돌려세운 베트남의 실력

선제 공격의 이점과 병력상의 우위를 앞세운 중국군의 공세를 베트남군이 막기가 처음에는 쉽지 않아 보였다. 주력부대가 캄보디아 침공 중이었던 베트남군은 민병대까지 긁어 모아 방어에 나섰다.

한국전쟁 이후 20여 년 만에 실전을 치른 중국군의 실력은 예상보다 약했다. 반면 베트남군은 미군을 상대로 십수 년의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가진 베테랑이었다. 또한 명분 약한 전쟁에 나선 중국군에 비해 조국을 지키려는 베트남군의 항전 의지가 더 끈질겼다.

결국 중국군은 베트남 국경지대에 위치한 도시 랑선을 점령해 초토화한 후 3월16일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전쟁을 개시한 지 27일 만이었다. 양국은 각각 최소 6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어떤 이유로 시작했건 간에 전쟁은 양쪽 모두에게 감당하지 않아도 될 막대한 피해를 안겼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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