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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명의 이슬람 문명기행] 화려한 이슬람 문명 뒤엔 피정복자 페르시아인 있었다

입력
2019.03.09 04:4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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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중세 이슬람 세계 학문을 지배한 페르시아 지식인 

 

 ※ 이슬람 국가 모로코에서 이슬람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정명 명지대 교수가 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는 이슬람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매주 들려드립니다. 

발레리아누스를 사로잡은 샤푸르 1세 마애상. 샤푸르 1세는 페르시아의 재부흥을 일궈낸 사산 왕조의 황제로, 무릎을 꿇은 쪽이 로마 제국의 발레리아누스, 말 탄 쪽이 샤푸르 1세다.
발레리아누스를 사로잡은 샤푸르 1세 마애상. 샤푸르 1세는 페르시아의 재부흥을 일궈낸 사산 왕조의 황제로, 무릎을 꿇은 쪽이 로마 제국의 발레리아누스, 말 탄 쪽이 샤푸르 1세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7세기 초 아랍인들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사건을 몽골의 중국 정복과 비교하곤 한다. 두 역사적 사건에는 매우 유사한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정복 사업이 순식간에 벌어졌다는 것이고, 둘째는 무력을 앞세웠던 정복자가 피정복민에게 문화적으로 오히려 압도됐다는 것이다. 이슬람 문명은 아랍인들의 정복에 의해 기틀이 마련됐지만, 황금기 시절 화려한 이슬람 문명의 꽃은 페르시아 지식인들에 의해 개화됐다.

 ◇패전한 페르시아인, 이슬람 세계 학문을 주도하다 

7세기 초 이슬람 세력에 의해 정복되기 전까지 중근동 지역의 최강자는 페르시아의 사산 제국(226~651)이었다. 전성기 시절 사산 제국은 로마와 비잔티움 제국에게 가공할 위협이 될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했으며, 이란, 이라크, 레반트, 이집트, 터키 일부, 중앙아시아 일부 등을 아우르는 광활한 영토를 다스렸다. 하지만 사산 제국은 636년 시리아 지역에서 벌어진 카디시야(Qadisiyyah) 전투에서 이슬람 원정대에 의해 크게 패했고 이듬해 수도 크테시폰이 함락돼 멸망하고 말았다.

아랍‧무슬림 군대의 페르시아 정복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었고, 충격적일 정도로 순식간에 진행됐다. 하지만 군사적인 정복이 곧 문화적인 정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페르시아인들은 군사적 패배로 인해 이슬람 제국에 편입돼 조로아스터교를 버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지만, 마음 한쪽에는 여전히 자신들이 문화적으로 아랍인들보다 우월하다는 자긍심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인들이 피정복민으로서의 굴레를 벗고 이슬람 세계의 주역으로 당당하게 부상하기 시작한 때는 정복 후 약 한 세기가 흐른 750년 무렵 압바스조(750~1258) 창건 이후부터였다. 압바스조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페르시아 인구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이들을 자신의 군사적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정책을 적극 펼쳤고, 결국 페르시아인들의 도움으로 우마이야조(661~750)를 무너트리는데 성공했다. 이때부터 페르시아인들은 바그다드에 위치한 압바스조 궁전에 전문 관료로 대거 발탁되기 시작했다. 대제국 운영 경험이 전혀 없었던 아랍 통치자들에게 과거 사산 제국 시절부터 전수돼 온 페르시아 관료들의 경험과 노하우는 매우 유용했다.

페르시아인들의 잠재된 역량은 학문, 문화, 예술 분야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9세기 초 압바스조의 7대 칼리파 알마문은 전문 번역‧학술연구기관인 ‘지혜의 전당’을 설립하고 갖가지 문예 진흥 정책을 추진했다. 이때 페르시아 지식인들은 과거 사산 제국 시절부터 축적돼 온 학문 연구 업적을 바탕으로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등으로부터 수입한 학술서적을 체계적으로 번역하고 연구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4세기 북아프리카 출신 아랍인 역사학자 이븐 칼둔이 저서 ‘역사서설’에서 “놀라운 사실이지만, 이슬람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부분의 학자는 아랍인이 아니다.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율법학과 이성(理性) 학문 분야의 학자 대부분은 페르시아 출신이다”라고 한 언급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중세 이슬람 문명 황금기에 학문 분야를 지배한 집단은 정복자 아랍인이 아니라 피정복자였던 페르시아인이었다.

 ◇페르시아, 인도의 수학을 유럽에 전수하다 

9세기 무렵 이슬람 세계에서 활약한 가장 대표적인 페르시아 출신 지식인으로 천재 수학자 알크와리즈미(al-Khwārizmīㆍ780~850)를 꼽을 수 있다. 오늘날 수학, 컴퓨터 과학, 언어학 등에서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해진 일련의 절차나 방법을 공식화한 형태로 표현한 것을 ‘알고리즘(Algorithm)’이라 칭하는데, 이 용어는 다름 아닌 알크와리즈미의 라틴어식 이름 ‘알고리스무스(algorismus)’에서 따온 것이다.

고향인 우즈베키스탄 히바에 세워진 알크와리즈미의 동상.
고향인 우즈베키스탄 히바에 세워진 알크와리즈미의 동상.

알크와리즈미는 알마문이 설립한 지혜의 전당이 배출한 가장 걸출한 학자로 천문학, 산술, 대수학(代數學) 등에서 전대미문의 업적을 남겼다. 당시 바그다드에서는 인도의 브라마굽타가 저술한 수학서인 ‘싯단타’가 아랍어로 번역된 후 수학 연구의 열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알크와리즈미는 인도에서 전파된 수학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힌두 계산법에 따른 덧셈과 뺄셈’이란 저서를 저술했다. 이 책은 이슬람 세계 최초로 십진법과 이를 기반으로 한 계산 방법을 소개한 저서로 평가된다. 또한 그는 ‘채우기와 균형의 서’란 책도 저술하여 대수학의 개념을 최초로 정립했다. 이 저서에서 그는 대수학을 이용해 일차방정식과 이차방정식을 푸는 방법을 소개했고, 적분의 계산 방법과 방정식을 800여 개의 예를 통해서 설명하기도 했다.

대수학을 소개하고 있는 알크와리즈미의 저서 ‘채우기와 균형의 서’
대수학을 소개하고 있는 알크와리즈미의 저서 ‘채우기와 균형의 서’

알크와리즈미의 두 저서는 12세기에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돼 유럽의 수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크와리즈미를 비롯한 무슬림 수학자들이 이룩한 업적은 13세기 무렵 유럽 최고의 수학자 레오나르도 피보나치(Leonardo Fibonacci)에게 직‧간접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피보나치는 1170년경 이탈리아 피사에서 출생했으며, 유년 시절 상인이었던 부친을 따라 지중해 전역을 여행했다. 그는 알제리에서 무슬림들로부터 아라비아 숫자를 처음 접하게 됐는데, 이것이 복잡한 계산을 푸는데 로마 숫자보다 훨씬 유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차방정식을 설명하고 있는 알크와리즈미의 저서 ‘채우기와 균형의 서
이차방정식을 설명하고 있는 알크와리즈미의 저서 ‘채우기와 균형의 서

피보나치는 1202년 ‘주판의 서(Liber abaci)’를 저술하며 알크와리즈미가 맨 처음 설명한 아랍 기수법을 유럽인들에게 자세하게 소개했다. 이 저서는 유럽의 수학 발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이후 유럽에서 아라비아 숫자가 본격적으로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피보나치는 ‘주판의 서’ 서두에서 자신이 설명하는 기수법이 아랍인들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밝히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제 1장을 시작한다. 아홉 개의 인도 숫자 9,8,7,6,5,4,3,2,1이 있다. 아홉 개의 숫자가 있고, 아랍인들이 알시프르(al-sifr)라 부르는 기호 0이 있으면 어떤 숫자라도 적을 수 있다.”

 ◇유럽 의학의 스승, 페르시아 출신 의학자 이븐 시나 

페르시아 학자들은 의학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 서양에서 라틴어식 이름인 아비센나(Avicenna)로 불렸던 이븐 시나(Ibn Sinaㆍ980~1037)가 가장 유명하다. 이븐 시나는 980년경 페르시아 왕국이었던 사만조 통치 시절 부하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천재로 명성이 자자했다. 놀라운 암기력을 지녔던 이븐 시나는 10세 때 이슬람 경전 쿠란을 모두 암송했고, 18세 때는 의학과 과학에 통달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철학 연구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형이상학’을 무려 40여 차례나 읽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이븐 시나의 ‘의학대전’에 수록된 인체 해부도
이븐 시나의 ‘의학대전’에 수록된 인체 해부도

이븐 시나는 철학, 신학, 의학 등 다방면에 걸쳐 99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유럽인들의 관심을 끈 것은 1020년경 아랍어로 저술한 5권 분량의 의학백과사전인 ‘의학대전(al-Qānūn fī al-Ṭibb)’이었다. 이 저서를 통해 의학 역사상 최초로 생리학 연구에 체계적인 실험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전염병과 성병의 감염 경로가 발견되었으며, 전염병 차단을 위한 검역소가 설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개념도 만들어졌다. 또한 책에 수록된 인체와 안구 해부도는 당시 이슬람 세계의 외과술이 얼마나 정교한 경지에 이르렀는지를 잘 보여준다.

1595년 베니스에서 인쇄된 라틴어 번역판 ‘의학대전’ 표지.
1595년 베니스에서 인쇄된 라틴어 번역판 ‘의학대전’ 표지.

이븐 시나의 ‘의학대전’은 12세기경 안달루시아에서 헤랄도라는 번역가에 의해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됐다. ‘의학대전’은 여러 항목을 백과사전 방식으로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유럽 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매우 높았다. 그 덕분에 책은 히포크라테스나 갈렌의 저서를 제치고 유럽 의학 대학교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교과서가 됐다. ‘의학대전’의 라틴어 번역판은 12세기 이후에도 여러 판본으로 계속 출판됐는데 1500년까지 16개에 달하는 판본이 인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650년대까지도 유럽의 의과 대학교 교과서로 계속 사용됐다. 알크와리즈미와 마찬가지로 이븐 시나는 전문 지식을 무기로 삼아 피정복민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슬람 세계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학문 발전에 공헌하는 대업을 이뤘다.

김정명 명지대 아랍지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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