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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상의 또 다른 시선, 워코노미] 사면초가 몰린 스파르타, 아테네의 ‘돈줄’을 끊다

입력
2019.03.09 10:00
수정
2019.03.09 12:48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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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테네 명운 가른 암피폴리스전투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귀결로 보입니다. 허나 미국의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저자가 격주 토요일마다 ‘또 다른 시선, 워코노미’를 연재합니다.

고대 그리스 장갑보병(호플리테스)의 전투 장면. 그리스 수도 아테네에 있는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된 암포라(목이 좁고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의 문양이다. ⓒGrant Mitchell
고대 그리스 장갑보병(호플리테스)의 전투 장면. 그리스 수도 아테네에 있는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된 암포라(목이 좁고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의 문양이다. ⓒGrant Mitchell

기원전 423년, 브라시다스가 이끄는 스파르타군 분견대는 트라키아의 도시 암피폴리스를 포위했다. 브라시다스의 시도는 여러모로 무리한 원정처럼 보였다. 델로스 동맹의 후방인 트라키아는 아테네의 원군이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게다가 근처의 섬 타소스에 이미 투키디데스 지휘 하에 있는 아테네군이 주둔 중이었다.

◇스파르타군의 승부수

펠로폰네소스전쟁(1차 기원전 460~445년, 2차 기원전 431~404년)은 스파르타를 맹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동맹과 아테네를 맹주로 하는 델로스동맹의 충돌이었다. 둘은 각각 그리스 내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을 상징했다. 스파르타는 농업에, 아테네는 무역에 의존했다. 예상할 수 있듯이 스파르타는 육군에, 아테네는 해군에 강점이 있었다. 두 도시국가는 57년 전 테르모필레 협곡과 살라미스 앞바다에서 페르시아를 상대로 실력을 증명했다.

8년 전에 시작된 2차 펠로폰네소스전쟁은 전혀 스파르타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아테네를 포위하려던 서전의 시도는 내륙의 아테네와 외항 피래우스를 연결하는 약 6㎞ 길이의 ‘장벽’에 의해 무산됐다. 2년 전 스팍테리아전투에선 죽을지언정 항복하지 않는다는 스파르타군의 명성에 금이 갔다. 20배 이상의 병력에 의해 포위되자 120명의 중장보병이 아테네군에게 항복했다. 포로들은 곧 인간방패로 활용되었다. 아테네 본토가 공격받으면 곧바로 포로를 처형하겠다는 아테네의 위협은 진지했다. 사면초가에 처한 스파르타에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브라시다스 분견대의 돈키호테 같은 원정은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뛰어드는 격이었다.

◇돈싸움이 된 그리스 전쟁

고대 그리스의 전쟁은 본래 단기간에 치러졌다. 밀과 올리브, 포도 등의 작물 재배가 중요했던 탓에 전쟁을 오래 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무력 사용은 도시국가 사이 분쟁 해결을 위해 피치 못할 일로 간주되었다. 어차피 한번 싸울 거라면 최대한 빨리 결판을 내는 게 모두에게 유리했다. 양측은 각각 밀집방진을 구성해 단판 승부를 냈다. 서로의 농사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가능하면 빈 공터에서 회전을 벌였다. 힘에 밀려 대열이 무너지면 지는 거였다. 팔랑크스, 즉 밀집방진간 대결은 초등학교 운동회의 차전놀이와 어떤 면으론 비슷했다. 졌다고 상대방을 학살하거나 하는 일은 금기시됐다. 그리스인에게 전쟁은 일종의 예식과도 같았다.

경제는 늘 전쟁의 한계를 규정해왔다. 무력을 발휘하는 수단인 무기와 군대는 당대의 기술과 경제 수준에 의해 주어졌다. 결정적인 요소 중 하나는 인구였다. 2차 펠로폰네소스전쟁 초반 장벽 내에서 농성하는 아테네의 전략에는 명암이 공존했다. 성벽을 타개할 수단이 없는 스파르타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전염병이 돌기 좋은 환경이기도 했다. 실제로 기원전 430년 아테네는 역병으로 인해 3만명 가량의 성인 남자를 잃었다. 이는 당시 아테네 성인 남자의 반 정도였다. 이때의 인구 손실은 두고두고 아테네의 발목을 잡았다.

고대 그리스에서 경제를 지칭하는 단어는 ‘오이코노미아’였다.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와 관리를 뜻하는 ‘네메인’이 합쳐진 오이코노미아는 글자 그대로 ‘집안일의 관리’였다. 즉 끼니를 놓치지 않고 옷 등의 물품을 관리하고 분배하는 일이 바로 오이코노미아였다. 20세기 중반까지 미국 등에서 ‘홈 이코노믹스’라는 단어는 요리와 바느질을 가리켰다. 경제란 결국 먹고 사는 문제라는 뜻이다.

2차 펠로폰네소스전쟁은 그리스가 과거에 치렀던 여타 전쟁과 달랐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총력전 양상으로 바뀌었다. 예전에 준수하던 관습은 내팽개쳤다. 자신의 영토 대부분을 지키고 있던 스파르타에게는 큰 타격은 아니었다. 아테네는 사정이 달랐다. 곡물 생산이 어려워지면서 무역으로 번 돈으로 곡물을 수입해야 했다. 게다가 스파르타의 중장보병에 비해 아테네의 함대는 건조 및 유지 비용이 훨씬 컸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래픽=송정근 기자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래픽=송정근 기자

◇전비 대느라 민심을 잃다

아테네의 돈 조달 방안은 크게 네 가지였다. 첫 번째 수입원은 은광이었다. 아테네 남쪽에는 오래된 은광 라우리온이 있었다. 전쟁 전 아테네는 이로부터 매년 약 100탈란톤의 은을 얻었다. 또한 암피폴리스 근방의 은광도 소유했다. 두 번째 수입원은 델로스동맹 소속 도시국가들로부터 받는 돈이었다. 아테네는 지역 내 평화 유지에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조공을 강요했다. 즉 일종의 방위비 분담금이었다. 2차 펠로폰네소스전쟁 발발 전에는 매년 평균 480탈란톤을 걷었다. 그러다 전쟁이 시작된 기원전 431년에는 600탈란톤으로 올렸고 기원전 429년부터는 1,300탈란톤을 받아갔다.

세 번째 방법은 국채 발행이었다. 쉽게 말해 빚을 지는 거였다. 아테네는 매년 평균 600탈란톤을 다른 도시국가 폴리나스와 니케아로부터 빌렸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갚아야 할 이자와 원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마지막 네 번째 방법은 세금 부과였다. 처음에는 직접 부과하던 조공을 폐지하고 아테네를 통과하는 모든 물품에 5%의 관세를 물렸다. 그걸로도 돈이 부족하자 기원전 410년부터는 조공을 다시 부활하면서 관세를 10%로 올렸다. 델로스동맹 소속 도시국가들은 이제 아테네를 맹주로 여기기보다는 돈을 뜯어가는 불량국가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현재의 약 26㎏인 1탈란톤은 당시 돈 6,000드라크마에 해당했다. 주력함선 트리레메 한 척을 운용하는 데 필요한 200명의 노잡이들은 하루에 각각 1드라크마씩 일당을 받았다. 즉 함선 한 척을 운용하는 연간 비용이 12탈란톤이었다. 100척이 넘는 트리레메를 운용했던 아테네 해군은 매년 1,200탈란톤 이상을 써 없앴다. 실제로 27년의 전쟁 기간 동안 아테네는 매년 평균 1,527탈란톤을 전쟁 비용으로 지출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둘 다 노예 없이는 경제가 돌아가지 않는 노예제 국가였다. 아테네의 민주제는 소수의 아테네 성인 남자만을 위해 존재했다. 내적으로는 여자들의 권리를 철저히 무시했고 외적으로는 주변 도시국가 사람들을 노예로 부렸다. 아테네 여자들은 교육에서 배제됐고 재산의 보유와 처분에 제약이 컸으며 심지어 여자아이에게는 열등한 음식만 줬다. 그에 비해 스파르타 쪽이 좀 더 인간적이었다. 스파르타 여자들은 남자와 거의 같은 교육을 받았고 재산 보유에도 제약이 없었으며 음식의 차별도 없었다.

◇은광을 잃은 아테네의 최후

아테네의 바람이 무색하게 브라시다스는 손쉽게 암피폴리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투키티데스의 부대는 브라시다스가 장악한 암피폴리스를 탈환하는 데 실패했다. 이로써 아테네에게 남은 은 수입원은 모두 사라졌다. 고정된 수입원을 잃은 아테네는 점점 더 주변국을 쥐어짜고 더 많은 빚에 의존하게 됐다. 이것으로 전쟁의 향배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암피폴리스전투는 한 가지 예측하기 어려운 결과를 가져왔다. 아테네의 민주정부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투키티데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는 추방했다. 이제 투키티데스는 비시민 자유인으로서 전장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기록을 남겼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그것이다. 즉 그는 실패한 군인에서 이름을 남긴 역사가로 변신했다.

아테네의 착취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델로스동맹 소속 도시국가들은 기원전 405년 아고스포타미해전에서 아테네 함대가 리산데르가 지휘하는 스파르타함대에 괴멸되자 곧바로 아테네에게 등을 돌렸다. 우방국과 함대를 모두 잃은 아테네는 다음해 결국 스파르타에 항복했다. 이후 아테네는 다시는 예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승자인 스파르타도 힘이 소진되기는 매일반이었다. 전쟁 말기에 페르시아와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페르시아 해군을 이용해 아테네를 공격할 정도였다. 페르시아의 ‘나누고, 지배하라’ 전략에 말려든 그리스는 이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등장할 때까지 지리멸렬한 상태로 지냈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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