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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캐슬, 사실은?] “반성문ㆍ탄원서 쓸데없는 짓?”… 잘 쓰면 법도 눈물 흘린다

입력
2019.03.04 04:40
수정
2019.03.04 07:28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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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탄원서ㆍ반성문의 힘

성경책 베끼고, 참회 수필 쓰고… 형량 줄여보려 필사적으로 제출

전지에 쓴 아내의 애절한 탄원서에 재판부 감탄 “그녀 옆에서 갱생을”

[저작권 한국일보] 송정근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송정근 기자

“탄원서라니! 그게 무슨 법적 효력이라도 있는 줄 알아? 다 쓸 데 없는 짓이야. 다 시간 낭비라고!” (드라마 ‘스카이캐슬’ 차장검사 출신 로스쿨 교수 차민혁)

“판사가 일주일에 처리하는 사건만 100개가 넘는데 반성문이 얼마나 많이 들어오겠어요. 페이지가 소설급이면 정성이 갸륵해서라도 실형주기 미안하지. 왜? 판사도 사람이니까” (드라마 ‘친애하는 판사님께’ 전과5범 한강호)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느 말에 따라야 하나, 고민이 밀려 든다.

탄원서와 반성문은 법정 드라마나 영화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구치소에서 수감자들이 빙 둘러앉아 서로 반성문을 고쳐주거나, 억울한 누명을 쓴 자식을 위해 부모가 지인들을 찾아 다니며 탄원서를 받는 장면 등은 흔하다.

◇성경 베끼기에 수필까지 … 그 효과는?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떻게든 실형을 피하거나 형량을 줄여보기 위해 피고인과 지인들은 필사적으로 반성문과 탄원서를 쓴다. ‘존경하는 재판장님께’로 시작하는 이런 글은 법관들마다 하루에 수십 건씩 받아본다. 드라마와 영화야 그렇다 치고, 이거 진짜 효과가 있는 걸까.

반성문, 탄원서에 따로 지정된 양식은 없다. 쓰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그러니 기발한(?) 글들이 등장한다. 반성의 진정성을 전달하기 위해 참회의 뜻을 담은 좋은 글귀나 성경책의 몇몇 문구를 매일 베껴 내거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두 마디만으로 A4용지를 가득 채워 내는 경우도 있다. 수필을 쓰는 사람도 있다. ‘저녁을 먹고 나동 17호 3호 방에 총 13명의 구속자들이 둘러앉아 반성문을 쓰는 이 시간, 제 서툰 인생을 돌아봅니다. 이곳 생활은 힘들지만, 다른 수감자들의 도움으로 아직까지는 잘 버티고 있습니다’라는 식이다. 탄원서의 경우 특정 단체가 탄원서 취지만 적고 수십 수백 명의 서명을 받아 제출하기도 한다.

◇판사들 “읽어는 보지만…” 영향력은 미미

미안하지만 이런 반성문, 탄원서는 효과가 제로에 가깝다.

우선 형사재판의 제1순위는 객관적 증거자료이기 때문이다. 탄원서나 반성문은 증거로서 가치가 없다. 형사재판을 오래한 지방의 한 법원 부장판사는 “간혹 반성문에 피해자와 합의하려 노력하고 있다거나, 공탁금을 넣었다는 등의 내용을 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걸 놓치지 않으려 제출된 건 다 읽어보는 편”이라면서도 “형량을 정하거나 유무죄를 판단할 때는 증거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에 반성문이 큰 영향을 주진 않는다”고 말했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도 “판결문에 양형 참작사유로 ‘피고인이 반성하고 있고’ 라는 문구를 자주 넣는데, 이건 ‘피고인이 반성문을 제출했고’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며 “실제 양형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고 말했다.

탄원서는 더하다. 지극히 ‘한국적인 문화’가 반영돼서다. 서울고법의 또 다른 부장판사는 “가까운 지인이 법정에 서면 우리나라 정서상 탄원서를 안 써줄 수 있겠느냐”며 “그 정도 가까운 지인이면 좋은 얘기만 골라 쓸 게 뻔하다”고 말했다. 가벼운 음주운전이나 폭행 사건의 경우 전과가 없다면 참고해 볼만도 하지만, 살인 등 죄질이 안 좋은 중한 사건에선 참고하기가 불가능하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살인 누명을 쓰고 구치소에 구속된 우주를 위해 같은 반 친구들이 쓴 탄원서. JTBC제공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살인 누명을 쓰고 구치소에 구속된 우주를 위해 같은 반 친구들이 쓴 탄원서. JTBC제공

◇그럼에도 법에는 눈물이 있다

그렇다고 반성문이나 탄원서가 아예 무용지물인 것은 아니다. 도박으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 받고 구속된 피고인의 아내가 전지에 손톱만한 글씨로 탄원서를 써 냈는데 그 정성과 내용의 진정성에 감동한 재판부가 집행유예를 선고해 항소심에서 풀려난 경우다.

당시 재판에 참여했던 판사는 “보통 A4용지 한두 장에 틀에 박힌 얘기들만 써서 제출하는데, 이 피고인의 아내는 남편을 어떻게 만났고, 왜 도박에 빠졌는지, 그만두려 했지만 그러지 못한 배경 등을 커다란 전지에 상세하게 설명했다”며 “당시 전지를 큰 책상에 펼쳐놓고 읽으면서 다들 감탄을 금치 못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런 아내가 곁에 있다면 한번쯤 기회를 더 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트럭기사가 졸음운전으로 4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에서도 피고인의 동료들이 피고인의 평소 업무 강도 등을 세세하게 적어 졸음운전이 고의가 아니었음을 탄원서로 낸 사례가 있는데, 이 또한 탄원서가 양형에 참작됐다. 해당 재판에 참여한 판사는 “사람이 여럿 사망한 큰 사건이기 때문에 형량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면서도 “탄원서 내용을 참고해 가중처벌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반성문이 효과를 발휘한 경우도 있다. 특수절도 7범으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 받은 피고인이 ‘용서’를 주제로 반성문을 제출했는데, 그 내용이 재판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해당 피고인은 반성문에서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용서를 받아본 적이 없다’며 ‘어렸을 적 뭔가를 잘못해서 용서를 빌면 아버지는 욕하며 매질만 했고, 학교에서도 선생님은 항상 꾸짖기만 했다’고 썼다.

이에 재판부가 ‘우리라도 기회를 줘보자’며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판결문에도 ‘피고인의 죄는 중하나 이번에 한해 특별히 용서한다’며 ‘용서’라는 단어를 넣었다. 이 재판에 참여한 판사는 “상습 절도범이고 그 전에 벌금, 집행유예 등을 몇 차례 선고 받았었기 때문에 용서를 아예 안 받은 것은 아니다”면서도 “피고인이 진심으로 용서 받았다고 느낄 수 있게 한 번 더 기회를 준 것이고, 이를 계기로 더 잘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내는 탄원서도 재판에 영향을 미친다. 피해자의 탄원서는 대개 ‘가해자를 엄벌에 처해달라’는 것이기에 오히려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내용일 경우 효과를 발휘한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가해자가 잘못은 했으나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있고 피해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등의 내용을 피해자가 탄원서에 담아주면 유리한 양형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 ‘법조캐슬, 사실은?’은 흔히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접하게 되는 법조인과 법조계 이야기를 다룹니다. 영화와 드라마는 극적 갈등을 위해 아무래도 상황을 과장하게 마련입니다. 캐슬 속에 산다는 그들이 진짜 고민하는 건 무엇일까요. 격주 월요일마다 보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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