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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서 젖 먹이며… 자식 잃은 슬픔 견디며… 부부 한마음 독립운동

입력
2019.02.26 04:40
수정
2019.02.26 16:47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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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5> 3ㆍ1운동 함께 나선 부부들 

 주명우 “신체 강탈당해도 정신은 불복”… 상고 이유가 부부 묘비명으로 

 이규갑ㆍ이애라 부부 등 한성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항일운동 큰 기여 

주명우ㆍ윤악이 부부의 외손자 조창렬씨가 지난 19일 경기 고양시 자택에서 직접 번역한 외조부모의 판결문을 들어 공적을 설명하고 있다. 류효진 기자
주명우ㆍ윤악이 부부의 외손자 조창렬씨가 지난 19일 경기 고양시 자택에서 직접 번역한 외조부모의 판결문을 들어 공적을 설명하고 있다. 류효진 기자

“신체는 강탈당했을지라도 마음은 절대로 이에 불복한다”(주명우의 상고심 신청 이유 중)

1919년 3월 18일 경북 영덕군 지품면의 기독교인 주명우(1881~1952ㆍ애족장)는 같은 교회 김중명으로부터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듣는다. 인근 교회의 김세영이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서울을 들렀다가 3ㆍ1운동을 접한 뒤 지품면으로 돌아와 독립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독립운동사 제3권). 주명우는 다음날 오전 11시 기독교인 수십 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라고 적힌 태극기를 손에 쥐고 주재소(일제 순사의 사무 공간)로 향한다. 군중의 선두에 선 그는 “우리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독립운동을 지속할 것이다”라고 연설한 뒤 경찰에 체포된다.

여느 집이었으면 눈물바다가 됐을 터. 하지만 아내 윤악이(1897~1962ㆍ대통령 표창)는 이를 악물었다. 남편 체포 후 5일 뒤인 3월 24일 자신처럼 남편(김태을ㆍ대통령 표창)이 붙잡힌 신분금(1886~?ㆍ대통령표창)등과 원전동 시장에서 “우리는 독립을 희망한다”라며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징역 8개월을 선고 받는다(대전지방법원 영덕지청 4월 16일 판결문).

최근 만난 주명우ㆍ윤악이 부부의 외손자 조창렬(82)씨는 “외조부모가 감옥에 있을 때 어머니가 겨우 두 살이어서 외증조할머니가 홀로 키웠고 면회를 가 젖을 먹이기도 했다고 들었다”라고 말했다. 주명우는 상고심을 신청하며 밝힌 이유에서 “대한민족이 하늘을 우러러 대한의 독립을 축원함이 어찌 징역형에 해당하리”라며 “이는 하늘도 결코 용납하지 않으리라. 신체는 강탈당했을지라도 내 마음은 절대로 이에 불복한다”라고 했다. 이 문구는 그대로 대전 현충원에 함께 잠든 부부의 묘비명이 됐다.

일제의 폭거에 신체와 정신이 움츠러들었던 암흑의 시대. 1919년 3월 1일 시작돼 전국으로 번진 독립운동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던 가정의 부부들의 심장을 함께 뛰게 했다. 어린 자식의 울음소리와 가족의 만류를 뒤로 한 채 몸을 사리지 않던 부부들의 함성은 항일운동의 화력을 키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어린 자식 뒤로 하고 구국 활동 

가정의 중심인 부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가는 남은 가족이 오롯이 치러야 했다. 군인이었던 홍원식(1877~1919ㆍ독립장)은 1907년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의 계략에 의해 진행된 군대 해산에 반발해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부상을 입었다. 이후 고향인 경기 수원군 향냠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로 내려와 구국동지회를 조직했고, 자신을 수사 중인 일본 헌병을 죽이는 등 무력 항일에 몰두했다. 그러던 중 3ㆍ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그 역시 4월 5일 1,000여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발안 장터에서 행진하게 된다. 이때의 충돌로 일제 경찰들이 피해를 입자 일제는 일본 경찰과 헌병대를 제암리로 파견했다. 여기서 희대의 비극인 ‘제암리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4월 15일 일본 군경은 홍원식과 강태성(애국장) 등 20대 이상 남자들을 끌어내 제암리 교회에 가둔다. 그리고는 문을 안팎에서 걸어 잠그고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때 남편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게 된 강태성의 부인 김씨(1899~1919ㆍ애족장)와 홍원식의 부인 김씨(1877~1919ㆍ애족장)는 남편을 구하려다가 일제의 총에 희생된다. 홍원식의 손자 홍원기(81)씨는 “당시 10살로 혼자 고아가 된 아버지(홍선헌)를 봐줄 사람이 없게 되자 아펜젤러가 데려가 배재학당에 다니게 하셨다”라며 “아버지가 20대에는 만주로 넘어가서 독립군에 계시다가 광복 후에야 서울로 오셨다”라고 말했다. 당시 희생된 강태성 부부의 후손은 현재까지도 행방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이규갑(1888~1970ㆍ독립장)과 그의 아내 이애라(1894~1922ㆍ독립장)는 독립운동 중 자식을 잃는 슬픔을 견뎌내야 했다. 공주 영명여학교에서 부부 교사로 있던 이들은 이규갑이 평양에서 전도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평양에 자리를 잡게 된다. 이규갑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서울로 간 사이 이애라는 평양에서 3월 1일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서에 구금된다. 이후 서울로 온 이애라는 남편과 함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 준비와 투옥 인사 후원 모금 운동 등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이애라는 1919년 4월 어린 막내딸을 업고 서울 마포구 아현동 거리를 지나다 경찰의 검문에 걸릴 위기에 처한다. 순간 그는 독립운동 활동의 비밀을 지키려는 마음에 달아나는 과정에서 경찰에 아이를 빼앗겼다. 분개한 일제 경찰은 아이를 거리에 내동댕이쳤고, 이애라를 뒤따르던 지인이 급히 주워 안았지만 아이는 싸늘한 주검이 됐다(김승택 논문, ‘일제강점기 이규갑ㆍ이애라 부부의 민족운동’). 이후 이애라는 임시정부를 돕는 여성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다 남편과 함께 만주로 건너갔고, 국내 연락 차 입국하던 중 경찰에 붙잡혀 27세 나이에 순국했다.

1938년 김예진(뒷줄 왼쪽 두번째)의 평양신학교 졸업 후 찍은 가족사진. 뒷줄 왼쪽부터 장남 동명, 김예진, 장녀 선명, 차녀 재명. 앞줄 왼쪽부터 3녀 광명, 4녀 순명, 아내 한도신, 차남 동수.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1938년 김예진(뒷줄 왼쪽 두번째)의 평양신학교 졸업 후 찍은 가족사진. 뒷줄 왼쪽부터 장남 동명, 김예진, 장녀 선명, 차녀 재명. 앞줄 왼쪽부터 3녀 광명, 4녀 순명, 아내 한도신, 차남 동수.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유복한 가정 풍비박산, 온갖 고초도 함께 

남편의 활동에 영감을 받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아내들은 남편 못지않게 고초를 겪기도 했다. 한도신(1896~1986ㆍ애족장)은 3ㆍ1 운동 전날인 1919년 2월 28일 평양에서 남편 김예진(1898~1950ㆍ독립장)으로부터 긴 당목(무명실로 짠 천) 한 두루마리를 건네 받았다. “이거 태극기 형상대로 재봉 좀 해주오”란 말뿐 설명은 없었다. 한도신은 안방 문틈 사이로 남편과 학생들이 태극기 견본을 빙 둘러싼 채 “때가 왔습니다. 마음속으로 기도할 사람 기도하고 맹세할 사람 맹세합시다”라며 결의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 자신이 독립운동의 물결에 올라탄 걸 깨달았다. 한도신은 “재봉틀로 대형 태극기를 만들면서 새벽에 밤참을 만들어 안방에 가보니 남편과 학생들이 종이에 그린 태극기를 대나무 꼬챙이에 매달아 수백 기를 만들고 있었다”라며 “해가 뜨자마자 태극기를 담은 가마니를 가지고 남편이 나갔고 평양 서문거리 쪽이 나팔소리, 북소리, 만세소리로 요란해지더니 ‘대한독립만세’라는 외침이 한목소리로 똑똑히 들렸다” (한도신 회고록 ‘꿈 갓흔 옛날 피 압흔 이야기’)라고 전했다.

이후 한도신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부탁으로 유인물을 비밀리에 배포하고 남편의 평안남도청 폭탄 투하에 사용된 폭탄과 무기 등을 은닉하는 등 무력 항일운동에 관여하게 된다. 정미소를 운영하며 부족함 없이 지냈던 시댁은 어느덧 풍비박산이 났다. 부부가 김구, 안창호 선생과 함께 상해와 국내에서 활동하는 동안 목숨을 위협받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도신은 회고록에서 “이때(3ㆍ1운동)부터 남편은 구사일생이 계속되는 파란곡절의 인생을 살았고 나도 모든 것을 체험했다. 밥 굶을 걱정 없는 복 많은 색시라고 들었던 것이 엊그제였는데 말이다”라고 말했다.

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김수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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