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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송구영신

입력
2018.12.31 04:40
수정
2018.12.31 07:38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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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어김없이 매년 돌아오는 예정된 날이지만, 2018년 마지막 날을 보내며 떠나보내고 싶은 것들과 새롭게 맞이하고 싶은 것들을 문득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더 이상 어설픈 포용과 공감의 위선에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미 잘 알고 있듯이, 한국 사람들 참 정(情)이 많다. 낯선 사이에서는 세상 무표정하고 무뚝뚝하지만, 일단 개인적 친분이 있는 지인(知人)의 범위에 들고나면 지나치리만큼 서로에게 관심이 많고 정이 넘친다. 서로 잘 아는 사이끼리 합리성의 기준에 따라 원칙을 따지고 불확실성에 대비한 약속을 사전에 분명히 해두려고 하면 어김없이 ‘정 없는’ 녀석으로 간주되어서 한국 사회 특유의 공식적ㆍ비공식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가족 사이에서 혹은 소규모 지역공동체 단위에서는 그와 같이 정에 입각한 사회적 관계의 긍정적 의미가 클 수 있다. 그러나 국가 단위에서 주요한 공적 의사결정이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곤란하다. 때로는 냉정해 보일 수 있지만, 보다 철저한 현실인식에 바탕을 둔 합리적 의사결정이 국가와 사회를 부강하고 풍요롭게 만든다. 특히 장기적으로는, 포용과 공감의 위선이 배려의 대상으로 삼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더욱 그러하다.

비극적 사건과 사고를 빼놓고 인간사, 세상사를 논하기 쉽지 않다.

슬픔과 고통의 현실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하는 상대방이 분명한 상황을 두고 비극이라는 표현을 잘 쓰지는 않는다. 그러한 상황은 분노의 감정에 터 잡은 교정적 정의의 실현이 필요한 상황이다. 진정한 비극은, 등장인물 각자가 자신이 처한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들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개인적 선택들의 결과가 집합적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다. 극 중 누구의 노력으로도 그 파국의 흐름을 되돌리지 못한다. 세상사 많은 비극의 순간에는 절망과 고통의 피해자에게 다가와서 포용과 공감을 표현하는 수많은 이아고들이 등장한다. 많은 경우 그 포용과 공감은 위선이다. 그들은 그 절망과 고통이 자신의 정적인 캐시오로 인한 것임을 피해자에게 강조하고 그들의 분노와 증오를 이끌어낸다.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비극으로 이어지고 이아고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지난 10여 년 한국사회의 격변의 흐름을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 중 하나는 ‘비극’이다. 그 이전의 수많았던 사건 사고와 다른 점은 디지털 기술 발전으로 인해 그 처절한 비극의 순간이 너무나 생생하게 기록되고 남은 가족들과 시민들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이다. 극복하기 힘든 무력감과 분노의 감정이 모든 것을 압도한다. 비극의 원인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합리적 대응보다는 분노와 응징의 대상을 찾아 나서도록 하는 감정적 선동이 더 정치적 힘을 얻는다. 비극적 상황의 정치적 사유화(私有化)로 인한 비용은 결국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일반 시민과 국가의 몫으로 고스란히 귀결된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나라에만 특유한 것이 아니다. 이른바 포스트 트루스 시대를 맞이하면서 세계 각국의 많은 중요한 정치적 의사결정들이 합리적 집단지성보다는 감성적이고 왜곡된 선동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정치적 표현의 기회를 확대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더 진화시킬 것이라고 기대를 모았던 사회관계망 서비스가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기도 한다. 경제와 국방, 외교의 모든 면에서 국제정세 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서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해에는 부디 우리 사회가 지난 수년간의 비극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보다 이성적인 현실인식, 그리고 합리적인 문제해결 능력을 갖추는 방향으로 진보해나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지 않고 있기에는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미래가 실로 위중하다.

허성욱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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