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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단 한 명의 김지영도 잃을 수 없다

입력
2018.12.01 04:4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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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판매 부수가 100만부를 돌파했다. 이 책이 막 나와서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이 퍼질 무렵 책을 읽고 더 많은 여성이 여성으로서, 여성이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일들을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바로 이 지면에 썼다. 그 사이 이 책을 둘러싼 많은 일이 있었고,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책은 더욱 많이 팔렸다. 김지영은 같은 시절을 사는 여성을 뜻하는 보통명사가 됐다. 그 책을 읽은 여성들은 안다. 우리는 살아가며 김지영과 비슷한 일을 겪었고, 겪을 것이며, 지영씨는 우리 중에서도 꽤 운이 좋은 편이라는 사실을.

이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어디도 아닌 집이 여성에게 가장 위험한 공간이라는 UN의 통계가 공개됐다. 세계 전체의 상황이 이러하다면, 한국은 어떨까? 이미 지난 2년의 통계치로 보았을 때 한국의 가정폭력은 증가 추세에 있다. 뒤이어 지난해 국내 살인 사건 5건 중 1건은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 경우라는 통계가 확인되었다. 애인에 의해 살해된 경우까지 포함하면 살인 사건의 약 27%가 남성 파트너에 의한 여성의 죽음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전 남편, 전 동거남, 전 애인 등은 포함이 되지 않은 수치다. 같은 날 성별에 따른 혐오로 발생하는 폭력 범죄를 방지하기 위한 법안인 여성폭력방지법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이 폭력 범죄의 피해자는 대부분 여성이지만 그래도 법률 명칭에 여성의 이름만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남성 의원들의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 정도면 한국 여성에게는 집만 위험한 게 아니라 한국이 위험하다.

다시 소설 속 지영씨가 운이 좋았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래도 무사히 대학에 갔고, 취업했고, 결혼해서 사회가 원하는 정상 가족을 꾸려서 살고 있다. ‘서울 변두리 대단지 아파트 24평형에 거주 중인 34세 주부’가 되어 살기까지 겪어 온 일도 더 나쁠 수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지영씨가 운이 좋다고 말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이 상황 때문이 아니다. 지영씨가 적어도 가정 폭력을 경험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나 남편에게) 적어도 맞지는 않았잖아.” 이 말이 더욱더 무서운 것은 여성들마저도 가정 폭력이 겨우 운이 나빠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사회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가정 폭력을 범죄로 제대로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부장제 안에서 남성들은 살인에까지 이르는 폭력을 자행한다. 그러니 여성들은 곳곳에 일상으로 존재하는 폭력을 겪지 않은 것, 그 자체만으로 운이 좋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안전한 이별은 당연한 일이어야 하지만, 이제는 여성들이 서로 축하해 줄 만큼 천만다행인 일이 되었다. 다시 한번, 한국은 여성들에게 조금도 안전한 나라가 아니다.

좋은 소식을 애써 그러모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만들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계절이 시작됐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보고 싶었다. 정부는 가정폭력 방지 대책을 통해 가정폭력 가해자를 현행범으로 즉시 체포하는 것이 가능함을 명문화하기로 했다. 가해자와의 격리 방안도 보완ㆍ강화되었다. 디지털 성폭력 불법 촬영물에 대한 처벌 역시 강화되었고, 영리를 목적으로 불법촬영물을 복제ㆍ유포하는 경우에는 벌금형 없이 징역형으로만 처벌하게 되었다. 조금씩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드는 한 편, 겨우 이 정도에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서글퍼진다. 여성을 향한 폭력과 살해에 반대하며 모인 아르헨티나 여성들의 시위 구호는 ‘단 한 명도 잃을 수 없다’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남은 2018년 한 달, 이후 단 한 명의 김지영도 ‘맞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하지 않는 날이 올 때까지, 단 한 명의 여성도 결코 잃을 수 없다.

윤이나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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