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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의 화해]사사건건 간섭하는 새엄마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까요

입력
2018.12.03 04:4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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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한국일보]오은영의 화해_김경진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오은영의 화해_김경진기자

 #아홉살 때 친어머니 극단적 선택 

 몇주 뒤 집에 들어온 새어머니 

 용돈 안 주고 사생활 보고하게 해 

 ‘유일한 내 편’ 할머니 돌아가시고 

 왕따당해 힘들 때 되레 비난만 

저는 고등학생이예요. 어머니가 제 삶에 지나치게 간섭합니다. 저는 집보다 학교가 훨씬 편해요. 어머니는 ‘가족간에는 비밀이 없어야 한다’며 사생활을 존중해주지 않습니다. ‘돈 관리를 잘못한다’는 이유로 용돈도 주지 않아요. 친구들과 놀고 싶어 허락해달라고 해도 무조건 ‘안 된다’고 하십니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친할머니와 보냈어요. 그래서 어머니에게서 느낄 친근한 감정이나 애틋한 마음, 유대감이 없어요. 어머니와의 기억을 떠올려보려 해도 별로 없고, 오로지 할머니와 지냈던 기억뿐입니다. 할머니께서 맛있는 음식을 해주거나 과자 사먹으라고 용돈 주셨던 기억이 유년 시절 행복했던 기억의 전부입니다.

지금 돌이켜보니 부모님은 제가 세 살쯤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때 이후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어요. 그러다 제가 아홉 살 때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아직도 생생해요. 그때 할머니는 집에 없었고, 저와 아버지와 동생은 마트에 갔다가 집에 와서 그 일을 보게 됐어요. 그 기억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세세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그러고 몇 주 뒤, 아버지는 어떤 여자분을 데려왔고 저와 제 동생의 어머니라고 했어요. 어린 동생은 잘 따랐지만 저는 몇 달 동안 마음 속으로 ‘저 사람은 우리 엄마가 아니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인지 자꾸 엇나가고 싶었어요. 그럴수록 새어머니는 저를 더욱 가정에 묶어 두려 했어요. 학교에서 있었던 일 전부를 말해야 했고, 저 친구는 어떤 아이인지 세세하게 다 얘기해야 했어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제 방에도 수시로 들어와서 살폈어요. 비밀이 없어야 한다면서요. 사생활을 존중해달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그 때마다 ‘가족끼리 사생활은 없다’고 화만 내셨어요. 제 일기를 온 가족 앞에서 읽으면서 ‘너는 이래선 안 된다’고 혼내셨고, 그럴 때 전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러길 몇 차례, 이제 전 사생활 흔적을 지우는 습관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왜 감추느냐는 잔소리와 꾸중을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늘 어머니의 편이었어요.

유일한 제 편이었던 할머니가 5년 전 돌아가신 뒤 무척 힘듭니다. 그 때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적도 있었어요. 부모님께 말했지만 어머니는 “그 애들도 잘못이 있지만 너의 잘못이 더 크다”며 저를 비난했어요. 가족들도 동조했고요. 그 일로 전 큰 상처를 입었고, 지금도 사람을 잘 믿지 못합니다. 이런 환경이 개선될 수 없다면 저는 최대한 빨리 독립하고 싶어요.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박재이(가명ㆍ16세ㆍ고등학생)


 #새어머니ㆍ아버지는 미성숙한 부모 

 과도한 통제 일삼는 새어머니 

 스스로 떳떳하지 못해 그런 듯 

 대학 진학 후 기숙사 생활 등 

 부모로부터 독립 준비해 보기를 

재이양, 힘든 경험을 하고도 이렇게 저를 찾아줘서 고마워요. 저는 사연을 읽으면서 재이양이 나에게 도움을 청한 이유를 깊게 생각해보았어요. 표면적 이유보다 재이양의 마음이 힘든 핵심적인 원인에 대해서요. 또 앞으로 살아가면서 재이양이 채워야 할 마음 속의 빈 부분은 무엇일지, 그리고 궁금했어요, 과연 재이양은 본인의 마음 상태를 알고 있을까?

재이양은 낳아준 엄마에 대한 기억이 어떤가요. 엄마를 생각하면 어떤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르나요. 얼굴만 기억나는 엄마, 좋은 기억도 없고 그렇다고 학대받은 기억도 없고, 어떤 관계였는지 불분명한 엄마. 재이양도 가엾지만 재이양의 엄마도 외로운 인생이었네요.

엄마의 극단적인 선택은 너무 가슴 아파요. 재이양은 혹시 이런 생각을 했었을 수 있어요. ‘나를 조금이라도 사랑했다면 엄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었을까’ ‘남은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할 지를 생각했을까’ ‘나는 엄마에게 하찮은 존재인가’를요. 그러나 엄마가 재이양을 사랑하지 않아서 혹은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은 결단코 아니예요.

엄마는 아팠어요. 심한 독감처럼 엄마도 치료가 필요했어요. 하지만 엄마는 자신의 선택이 남은 자식이나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생각할 여력조차 없었을 거예요. 그렇게 떠난 엄마의 삶이 안타까워요. 엄마의 마지막 장면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고 했죠. 어린 아이가 얼마나 놀랐을까, 그리고 그 충격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재이양 일생에 얼마나 큰 트라우마로 남을까, 이 잊혀지지 않는 괴롭고 공포스러운 감정이 마음에 마치 빙산처럼 있을 거예요. 꽁꽁 얼어버린 감정이 스칠 때마다 서늘해지고 외로워졌을 거예요.

다행인건 엄마의 빈자리를 할머니가 메워주신 거예요. 할머니는 무척이나 재이양을 아꼈던 것 같아요. 맛있는 음식을 해 주고, 용돈을 주고, 사랑으로 대해주면서 부모 역할을 대신해 주셨을 거예요. 그런데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요. 할머니가 계셨더라면 재이양이 덜 외롭지 않았을까 해서 안타까워요.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면 그때 할머니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 잘 버텨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학교생활도, 공부도 잘 하고 있는 거예요. 더 중요한 건 재이양 자신이 건강하고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잘 큰 거예요.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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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를 잃었을 때 느꼈을 절망감은 아마 엄마를 잃었을 때보다 더 컸을 거예요. 고작 초등학생이었는데 할머니까지 돌아가시면서 사실상 부모를 모두 잃은 느낌이 들었을 거예요. 그런 할머니, 심리적으로 엄마였던 할머니가 얼마나 보고 싶을까요. 아빠가 계시지만 심리적으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지요. 아빠로서 듬뿍 사랑해주지도 않았고, 새어머니로부터 지켜주지도 못했어요.

재이양, 세상에 좋고 나쁜 부모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미성숙한 부모와 성숙한 부모가 있을 뿐이지요. 제가 볼 때 아빠는 인생의 위기 때,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자녀를 고려하지 않는 미성숙한 부모예요. 부모는 자녀를 사랑해주고, 보호해주고, 위기를 함께 의논해주고, 극복하도록 용기를 주는 존재예요. 아빠는 이 역할을 하지 않았어요. 재이양에게 인생을 의논할 진정한 어른이 없다는 게 가엾고 눈물이 납니다. 그래서 재이양이 ‘나를 어른으로 생각하고, 사연을 보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성숙한 부모라면 몇 주 만에 새 엄마를 데려오지 않았을 거예요. 재이양에게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어요.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예의도 아니예요. 그 부분이 너무 아쉬워요. 시간을 충분히 가졌더라면 결과가 달랐을 거예요. 옷을 입어도 헐벗은 느낌이고, 밥을 먹어도 굶주린 느낌이었을 거예요. 그건 재이양 잘못이 아니예요.

보내준 사연으로만 보면 새어머니는 재이양을 과도하게 통제하고 있어요. 물론 자식이 성장할 때 어느 정도 부모가 통제를 해야 올바르게 자랄 수 있어요. 하지만 새어머니가 일기장을 훔쳐보고, 그 내용을 가족에게 공개하고, 이를 비난하는 행위 등은 적절치 않아요. 과도하고 불필요한 통제예요. 왜 이렇게 새어머니가 재이양을 간섭하고, 통제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지요.

추측하건대 새어머니는 부모로서 자식 때문에 가슴 아픈 경험이 없는 사람일 거예요. 그리고 자식을 키우면서 느끼는 가슴 벅찬 감동을 경험해보지 못한 것 같아요. 보통 아이를 낳지 않아도 남의 집 아이가 학대 받거나 힘든 상황에 처하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고, 가여움을 느끼지요. 하지만 재이양의 새어머니는 그런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어요.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기 보다 통제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거지요. 과도한 통제를 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자신의 통제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불편하고 괴롭거든요. 말은 ‘가족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은 본인 마음이 편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자기를 위한 것이지요. 새어머니는 가족이나 부모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고 봐야지요. 가족은 어려움을 나누고, 위로하고, 배려하고, 힘들 때 보호해줘야죠. 새로운 부모로 이뤄진 가족도 서로 존중하고 아끼는 경우가 많지요.

또 다른 부분은 새어머니 스스로 떳떳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친모가 아니라는 점, 돌아가신 뒤 바로 가족이 됐다는 점 등을 들키고 싶지 않은 거지요. 재이양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무얼 알고 있는지 신경이 쓰이겠지요. 재이양이 나중에 자신을 무시할까봐 미리 통제하려는 것 같아요. 이 모든 행동은 재이양이 아니라 본인을 위한 것이예요. 미성숙한 부모라 그런 겁니다.

그런데 이런 건 새어머니의 문제이지, 재이양의 문제는 아니예요. 재이양이 새어머니에게 맞춰주는 것이 아니라 새어머니가 본인의 미성숙함을 깨달아야 해결될 문제지요. 재이양. 재이양은 할머니의 소중한 손녀이고, 떠나간 엄마가 눈 감으면서 가장 가슴 아파했을 딸이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이 펼쳐져 있는 이 지구상에서 유일한 존재예요.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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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하기에는 좀 이른 나이지만 대학 진학 등을 통해 준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은 독립할 나이입니다. 어렵더라도 용기를 내서 원하는 것을 주장해보세요. 내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마음 먹어 보세요. 기숙사 생활도 좋고, 생활비를 받고 아르바이트 등을 병행하면서 부모로부터 물리적으로 떨어져 지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부모님과 멀어지라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좀 더 크면 새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눠보세요. 새어머니가 재이양에게 떳떳하지 못했던 점을 사과하고 설명해야지요. 좋은 기억이 없더라도 재이양 또한 키워준 데 대한 고마움은 표시해 잘 매듭짓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할머니 성묘를 꼭 하시기를 권합니다. 할머니와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재이양이 얼마나 사랑받던 손녀였던가를 떠올려보세요.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지면을 통해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신청해 보세요. 사연은 한국일보 사이트(http://interview.hankookilbo.com/store/advice.zip)에서 상담신청서를 내려 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에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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