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감정노동자, 협력사 소속은 여전히 법적 보호 힘들어”

알림

“감정노동자, 협력사 소속은 여전히 법적 보호 힘들어”

입력
2018.11.05 04:40
수정
2018.11.05 11:24
27면
0 0

[인터뷰] 이정훈 서울시 감정노동 종사자 권리보호센터 소장

이정훈 감정노동 종사자 권리보호센터 소장은 “인격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 나의 감정을 관리할 수 있는 권리는 노동자의 기본 권리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감정 노동자의 권리는 인권 문제와도 직결된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이정훈 감정노동 종사자 권리보호센터 소장은 “인격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 나의 감정을 관리할 수 있는 권리는 노동자의 기본 권리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감정 노동자의 권리는 인권 문제와도 직결된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콜센터 상담원, 항공사 승무원, 금융 창구 직원, 요양보호사 등 감정노동 종사자를 위한 국내 첫 공공기관이 지난달 16일 문을 열었다. 작년 3월 서울 율곡로 서울노동권익센터에 만든 감정노동보호팀을 독립기구로 확대·개편시킨 서울시의 ‘감정노동 종사자 권리보호센터’가 이 곳이다. 이 센터에선 무료 심리상담부터 감정회복에 필요한 치유서비스와 피해 예방 교육 등을 받을 수 있다. 현재 전국 감정노동 종사자 740만명의 35%인 260만여명이 서울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달 30일 이 센터에서 만난 이정훈(43) 소장은 “감정노동은 감정을 통제해야 하는 환경에서 근로자 스스로 감정을 절제하고 조직이 요구하는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노동으로 1983년 학술용어로 통용됐다”며 “최근 일반의 관심과 관련 연구가 늘고 있지만, 사회적 인식 부족과 제도 미비 등으로 폐해는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 소장은 특히 감정노동에 대한 연구 측면에선 선진국과 우리나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고 전했다. “서구의 경우 어떤 직업을 가졌든,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물건 사러 갔을 때 직원이 친절하지 않아도 ‘그럴 수 있다’고 보는 거죠. 감정노동을 먼저 연구한 서구에선 감정노동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분석적인 연구가 주를 이룹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감정노동 피해사례, 원인과 결과 분석 연구가 많습니다. ‘고객은 왕’이란 인식은 시간이 지나야 바뀔 듯합니다.”

센터는 감정노동 실태조사를 시작으로 근로환경 개선사업을 중점 추진한다. 서울시의 ‘감정노동보호 기준’이 현장에서 잘 이행되는지 점검하고, 공공영역부터 모범사례를 만들 수 있도록 서울시 산하기관을 대상으로 맞춤형 컨설팅까지 지원한다. 감정노동 관련 시민단체, 의료기관, 기업, 정부기관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감정노동 간담회와 포럼 등을 통해 사회 인식개선 사업도 진행한다.

일반 시민을 위한 프로그램 또한 진행된다. 사전 신청자에 한해 1회당 1시간씩 10회의 무료 심리상담이 가능하다. 서울 율곡로 센터 본원 뿐만 아니라 동북권, 서북권, 동남권, 서남권 거점센터 4곳을 화~금요일 낮 12시부터 저녁 9시까지 운영한다. 5인 이상 감정노동 종사자가 심리치유 프로그램을 신청하면 총 8시간(2회 또는 4회) 강사를 파견, 감정 회복에 필요한 치유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소장은 “심리상담 기록은 당사자 동의를 거쳐 직종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 향후 관련 정책 수립에 참고한다”고 설명했다. 감정노동 전문가와 심리상담사 등 2개 팀 11명이 상시 근무한다.

이 소장은 감정노동 종사자의 권리 보호가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이 소장은 “이직률이 떨어지면서 장기근속자가 늘고, 숙련도가 쌓이니 제대로 된 답변이 신속히 이뤄질 수 있다”며 “이용객 만족도도 올라간다”고 전했다. 일례로 서울시가 운영하는 120다산콜재단은 2014년 2월 상담사에게 폭언과 성희롱 등을 내뱉는 악성민원인을 바로 법적 조치하는 ‘원스트라이크아웃’ 제도 도입 이후 악성전화가 92.5%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카드 역시 2012년부터 성희롱, 폭언을 일삼는 고객들에 대해서는 상담원이 두 차례(성희롱) 또는 세 차례(욕설) 경고 후 먼저 전화를 끊을 수 있는 제도를 시행했다. 제도 시행 전인 2011년 약 12%였던 이직률은 제도 시행 후인 2015년엔 5%로 집계됐다.

하지만 감정노동자들의 피해 보호를 위해선 아직까지 일정 부분의 강제성은 불가피하다는 게 이 소장의 생각이다. “이윤에 굉장히 민감한 민간 기업조차 내부 직원을 보호하는 게 단순한 ‘선의’가 아니라 이윤으로 환원된다는 인식이 마련된 거죠. 하지만 어쨌든 진상 ‘고객’과 각을 져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업계에서 먼저 시행하는 건 머뭇거립니다. 감정노동자 권리보호를 권장 사항이 아니라 법으로 강제할 필요가 있는 이유죠.”

이정훈 감정노동 종사자 권리보호센터 소장은 “감정노동자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선 일정 부분의 강제적인 조항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홍인기 기자
이정훈 감정노동 종사자 권리보호센터 소장은 “감정노동자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선 일정 부분의 강제적인 조항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홍인기 기자

센터가 문을 연지 이틀 후 ‘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한 근로자의 건강장해 예방조처’를 사업주 의무사항으로 명시한 일명 ‘감정노동 종사자 보호법(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시행됐다. 법안에 따르면 사업주는 고객 폭언 예방을 위한 문구 등을 사업장에 게시하고, 고객 응대업무지침 등을 마련해야 한다. 고객의 폭언이나 폭행 발생 시 근로자가 위험장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업무를 일시 중단하거나 휴식시간을 제공하고, 필요한 경우 치료와 상담도 지원해야 한다. 사업주가 이 같은 보호조치를 하지 않을 경우 최대 1,00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이 소장은 이에 대해 “감정노동 보호에 관한 전국 관할 법안이 마련됐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면서도 “과태료 부과 등 강제조항이 있지만 법의 실효성을 담보할 세부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감정노동의 피해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감정노동은 간접고용 형태가 대부분인데, 개정 법안은 원청의 책임을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올 여름 터진 백화점 화장품 매장 갑질 사건 같은, 대형유통매장 협력업체 소속 근로자는 법 사각지대에 놓인 셈이죠. 법안이 세세하게 개정될 때까지 현장에서라도 이런 문제들이 즉각 개선돼야 합니다. 진상 고객 1명으로부터 보호한 직원이, 새 고객 10명을 데려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