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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아는 엄마 기자] 유모차에 발을 밟혔을 때, 배려와 피해 사이

입력
2018.10.27 10:0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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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차. 한국일보 자료사진
유모차. 한국일보 자료사진

휴일, 아이를 데리고 놀이공원을 찾았다. 오전에 도착했지만 인파가 몰려 가까운 주차장은 이미 만차였다.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셔틀버스를 기다렸다. 버스 출입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 틈에서 떠밀리다시피 들어갔다. 설 자리를 잡으려는데 뒤에서 유모차가 밀고 들어왔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내 발이 유모차 바퀴에 깔렸다.

유모차엔 아기만 타고 있지 않았다. 아기용품과 가족 소지품이 담겼을 큰 가방이 함께 실려 있었다. 순간적 통증 때문에 나도 모르게 “아얏” 소리가 나왔고, 유모차의 주인을 쳐다봤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세게 유모차를 밀며 안으로 돌진했다. 내 목소리를 들은 승객들이 유모차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좁은 버스 안에서 양쪽으로 갈라지며 길을 터줬다. 타인의 불편을 외면한 유모차 주인이었지만, 아기 엄마는 배려의 대상이기에 사과받는 건 포기했다.

셔틀버스엔 출입문이 3개 있었다. 우리가 탄 맨 앞 출입문 말고 다른 문으로도 유모차가 들어왔다. 버스가 꽉 찼다 싶을 때쯤 뒤쪽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유모차 때문에 불편을 겪은 승객과 유모차 주인 간에 실랑이가 벌어진 듯했다. 셔틀버스는 물론 유모차가 타도되는 버스다. 그렇다고 다른 승객에게 불편을 끼친 유모차의 주인이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은 건 아니다.

유모차는 모성(母性)을 대변한다. 특정 이슈에 ‘유모차 부대’가 나타나면 관심이 집중되고, 사회 곳곳에서 유모차를 배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다. 그런데 우리 사회엔 유모차 때문에 불편을 겪거나 피해를 보는 사람도 공존한다. 나 역시 한때 유모차를 끌었다. 하지만 그땐 솔직히 내 유모차나 내 아이 때문에 불편을 겪은 타인의 입장에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더 이상 유모차가 필요 없어지니 그 불편에 공감이 가능해졌다.

공감 능력은 인간 본성의 하나다. 상대방이 느낀 것과 유사한 감정이 나타나는 현상으로, 뇌과학과 심리학, 진화생물학 분야의 중요한 연구 주제다. 뇌과학자에게 공감 능력은 뇌 속 신경회로가 빚어낸 화학반응의 산물이다. 다양한 사회성을 조절하는 복잡한 신경회로 어딘가에 공감에 영향을 주는 유전자가 있어 함께 작동한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는 개인별 공감 능력 차이에 주목한다.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부분, 성장 환경이나 사회관계에서 영향을 받은 부분이 얼마나 차이가 나길래 사람마다 같은 상황에 대해 공감하는 정도가 다른지는 심리학의 해묵은 질문이다.

공감 능력은 원시적인 수준부터 고등한 단계까지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공감 능력 중 하나가 하품이다. 회의 시간에 하품하는 동료를 본 사람의 뇌에선 그 의미를 졸리고 지겹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서 감정이 ‘전염’돼 하품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방식의 공감은 대부분 포유류에서 나타나지만, 이타심이나 동정심처럼 차원 높은 공감 능력은 인간 같은 일부 포유류만 갖고 있다고 진화심리학은 설명한다.

인간의 공감 능력은 가족이나 친구, 친지 등 자신과 가까운 대상에게 더 강하게 발휘된다. 타인이 처한 상황이나 감정을 자신이 전혀 겪어보지 않은 경우보다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경우에 공감의 정도가 더 커진다. 기술 발달은 이 같은 공감의 ‘범위’에 변화를 가져왔다. 캐나다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인쇄술의 발달이 공감 능력의 범위를 넓혔다고 분석했다. 인류가 책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서 역지사지(易地思之)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인터넷의 발달 역시 비슷한 기여를 해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최근 온라인에선 끼리끼리 모인 일부 커뮤니티가 공감 능력의 범위 확장을 억제하고 있다. 모임 안에서의 공감은 극대화하고, 모임 밖 이웃이나 집단에 대한 공감은 거부한다. 이런 양상은 공감 능력이 자연스럽게 발휘되는 것을 막고 다른 상황에 놓인 타인을 쉽게 배척하게 만든다. 유모차를 끄는 사람들은 유모차가 다른 이들에게 불편을 줄 수 있음을 공감하려 하지 않고, 유모차를 안 끌어본 사람들은 유모차에 사회의 배려가 필요함을 공감하려 하지 않게 된다.

공감 능력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요소로 과학은 모성을 꼽는다.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엄마들은 자신의 아이가 남에게 끼치는 불편을 과소평가하기 쉽다는 연구 결과가 여럿 있다. 타인보다 자식에 대한 감정이 더 크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자신의 공감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부모를 탓하려는 사람은 모성이 공감 능력보다 강한 본능이란 걸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면 ‘맘충’ 같은 극단적인 표현은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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