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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ㆍ18 현장’ 김 소령의 사살 명령… 단죄 없이 흐른 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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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ㆍ18 현장’ 김 소령의 사살 명령… 단죄 없이 흐른 38년

입력
2018.10.27 09:00
수정
2018.10.27 11:53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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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 수뇌부에 가려진 5ㆍ18진압 가해자들] 

 11공수여단 지나가는 버스에 발포 15명 사망 

 김 “부상자 2명 없애라” 지시… 40여명 목격 

 특례법 따라 공소시효 적용 안돼 처벌 가능 

5ㆍ18민주화운동 당시 자의적으로 시민들을 살상한 ‘김 소령’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첫 사망자가 발생한 1980년 5월 19일, 광주 시내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쫓고 있다. 당시 광주에 파견된 한국일보 기자가 촬영한 미공개 사진이다.
5ㆍ18민주화운동 당시 자의적으로 시민들을 살상한 ‘김 소령’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첫 사망자가 발생한 1980년 5월 19일, 광주 시내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쫓고 있다. 당시 광주에 파견된 한국일보 기자가 촬영한 미공개 사진이다.

검붉게 시들어 가는 포도나무 잎들이 한해 농사가 끝났음을 보여주는 충남 논산 외곽의 한 포도농장. 지난 18일 찾아간 그곳 농장과 주택은 인기척 없이 비어 있었다. 농장의 주인은 김모 예비역 소령. 70세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 언제 전역했는지도 명확치 않다. 농장 앞 포도판매 광고에서 찾은 휴대폰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김○○씨가 맞는지 묻자, “누구냐”고 경계했다. 기자라고 하자, “아파서 수술하고 누워있다”고 전화를 끊었다. 목소리는 힘이 넘쳤고 주변도 시끄러워 병원 같지 않았다.

김 소령은 5ㆍ18민주화운동 당시 11공수여단 작전보좌관이었다. 그의 살인 혐의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무려 29년 전. 가장 먼저 1980년 5월 광주 현장에서 7공수여단 중사로 복무하면서 김 소령의 민간인 사살 명령 장면을 목격한 최영신씨가 9년 뒤(1989년 1월) “5ㆍ18 당시 부상자 두 명을 김 소령이 사살하도록 했다”고 양심고백하면서 알려졌다. 그리고 1995년 검찰 수사에서, 또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공수부대원들의 진술로 그의 혐의는 연거푸 드러나고 확인됐다. 사람을 죽이면 여지없이 수사를 받고 처벌돼야 하지만, 그의 살인은 5ㆍ18 때 저질렀다는 이유로 예외가 됐다. 살려달라고 비명 지르는 부상자들은 피범벅이 돼 야산에 묻혔건만, 군 수뇌부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는 흔한 고발조차 당한 적이 없다. 세상은 오직 5ㆍ18민주화운동을 비극으로 이끈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등에게만 원망의 화살을 겨눴을 뿐, 단 한 번도 김 소령과 같은 현장 지휘관들의 자의적인 범죄에 죗값을 따지지 않았다. 아이러니다.

그의 범죄는 지금도 처벌할 수 있다고 법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김재윤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 등이 제정되면서 공소시효를 적용받지 않아 지금도 충분히 처벌할 수 있다”라며 “5ㆍ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출범하면 이미 과거 조사로 진상이 밝혀진 이런 범죄부터 검찰에 수사 의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5ㆍ18진상규명위 출범을 앞두고, 김 소령의 사례를 통해 38년간 방치된 5ㆍ18 현장 범죄 처벌 문제를 파헤쳤다.

5ㆍ18민주화운동 당시 주남마을 버스총격 사건에서 살아남은 부상자 2명을 사살하도록 명령한 김모 소령의 충남 논산 외곽 자택. 김 소령이 운영하는 포도농장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5ㆍ18민주화운동 당시 주남마을 버스총격 사건에서 살아남은 부상자 2명을 사살하도록 명령한 김모 소령의 충남 논산 외곽 자택. 김 소령이 운영하는 포도농장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40여명이 목격한 그 날의 범죄 

김 소령의 범죄는 5ㆍ18때 행해진 악랄했던 현장 범죄 중 가해자 신원이 가장 명확한 사례로 꼽힌다. 5ㆍ18관련 기록들을 보면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드러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김 소령의 범죄는 공수부대원 무려 40여명이 목격했다.

국회가 작성한 ‘5ㆍ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1989년 1월 16일 위원회는 주남마을 등 광주 현장을 찾았다. 80년 5월 23일 광주 외곽 주남 마을을 지키던 11공수여단 62대대 4지역대 병사들이 지나가던 버스에 발포해 승객 15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한 곳이다. 당시 위원회 참고인으로 출석한 최영신씨는 “여기 이 논바닥에 3명의 부상당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1명은 여고생(병원 이송 후 생존)이었고요. 누워있는 2명은 11여단소속의 모 소령이 ‘없애버려!’ 그러니까 거기에 쭉 구경하던 사병들이 ‘너너 너 가!’이런 식으로 해서 리어카에 싣고 내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어 “이쪽 밑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저는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한참 있으니까 정확하게 4발의 총소리가 ‘탕! 탕! 탕! 탕!’ 이런 식으로 났습니다. 거기에 갔던 병사 중 한 사람이 7여단소속이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얘기를 들으니까 대검으로 찔러서 안 죽으니까 담배 한 대씩 피우고 나서 바로 사살을 했다고 했습니다”고 말했다. 박태권 위원이 “살려달라는 애원의 소리가 어땠어요?”라고 묻자, “완전히 절규적이었습니다”라고 살고자 몸부림쳤던 부상자들의 상황을 전했다. 그는 “구경한 사람이 7공수와 11공수 다 합쳐서 40여명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최씨는 “두 사람은 치료를 하면 충분히 살 수 있는 상태로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에서도 김 소령의 혐의는 인정됐다. 위원회 보고서의 기술 내용을 보면, 부상자들의 상태를 본 11공수여단 작전보좌관 김 소령이 살려서 데려온 것을 책망하자 상황실 주변에 있던 4지역대 병사들이 부상자들을 처리했다. 당시 부상자들을 처리했던 병사는 11공수여단 62대대 4지역대 정모 중사 등 3명이었다. 인근 야산 중턱으로 수레를 몰고 간 한모 일병에 의하면 누군가 안락사를 시키자고 한 후 사살했고, 시신을 땅에 묻고 났을 때는 해 질 무렵(5월 24일로 추정)이었다. 당시 현장 부근에 있던 11공수여단 간부 중 누구도 이들의 행위를 제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 중사가 부상자들을 사살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확인된 피해자 신원은 채수길(당시 21세), 양민석(20)씨였다.

김 소령의 이런 범죄조차 모두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군 수뇌부의 범죄로 뭉뚱그려 넘기고 면죄부를 주는 게 합당할까. 국방부 과거사위에 따르면 2군사령부는 5ㆍ18 당시 ‘소요 확산 저지(작상전 제445호)’(5. 20. 23:25)를 지시했는데, ‘광주시 외부로 나가는 교통로 봉쇄’를 지시하고,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하는 계엄군들에게 ‘무기 휴대 폭도의 봉쇄선 이탈 절대 거부, 폭도 중 반항치 않는 자 체포, 반항자 사살, APC(장갑차) 또는 차량을 이용 강습 시도 시는 사살, 현 봉쇄망은 주도로만 치중치 말고 지선도로도 장악 폭도 탈출 적극 방지’라는 지침이 내려졌다.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은 이 외곽 봉쇄 작전 중에 이뤄졌다. 이 지침에 따르더라도, 반항치 않은 자는 사살이 아닌 체포하도록 돼 있다. 저항하지 않는 부상자를 사살하도록 한 김 소령의 범죄는 수뇌부에 책임으로 돌려 면죄부를 주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저작권 한국일보] 김 소령의 범죄 혐의 관련 일지= 그래픽 송정근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김 소령의 범죄 혐의 관련 일지= 그래픽 송정근 기자

 ◇검찰도 혐의 인정, 지금도 처벌 가능하다는데 

최영신씨의 고백에 따라 김 소령의 범행이 드러난 1989년 기준으로 보면, 당시 일반 살인죄의 공소시효(당시 15년)를 감안할 때 김 소령을 충분히 처벌할 수 있었다. 하지만 5ㆍ18 범죄라는 이유로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 기약 없이 시간이 흘렀다. 6년 후인 1995년 검찰이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수뇌부를 12ㆍ12, 5ㆍ18과 관련해 내란목적살인 등의 혐의로 수사(최종 16명 기소)할 때도, 김 소령 건은 수사대상에 올랐다. 1995년 7월 16일 당시 보도를 보면 “검찰 수사결과,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에서) 부상당한 주민 2명에 대해서는 알아서 처리하라는 작전보좌관의 지시에 따라 사병들이 사살한 뒤에 매장했던 것으로 확인됐다”며 “당시 공수부대 작전보좌관의 행위는 명백한 살인죄에 해당하지만 공소 시효가 지나 별도로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고 검찰은 밝혔다”고 돼 있다. 당시 공소시효가 약 두 달 정도 지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계엄 상태에서 계엄군에 의해 벌어진 범죄는 계엄 기간 공소시효가 정지된다는 해석을 토대로 하면 사실 당시에도 공소시효는 지나지 않았다. 계엄 상황에서는 공소를 제기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김재윤 교수는 “5ㆍ18 당시 범죄는 비상계엄이 해제될 때(1981년 1월 24일)까지 공소시효가 정지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더구나 1995년 말 ‘5ㆍ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5ㆍ18민주화운동법),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헌정범죄시효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내란죄, 집단살해범죄 등은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집단살해범죄란 유엔의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에 따라 국민적, 인종적, 민족적 또는 종교적 집단을 전부 또는 일부 파괴할 의도로 집단구성원을 살해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김용민 변호사는 “김 소령 사례는 공소시효 적용이 배제되어 처벌을 할 수 있다”라며 “넓게는 내란죄의 공범이 될 수 있고, 부상자 사살명령으로 좁게 본다면 (집단)살인죄의 공범 내지 교사범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변호사는 “어느 경우라고 하더라도 5ㆍ18민주화운동법 제2조, 헌정범죄시효법 제3조에서 내란죄는 1호, 살인죄는 2호가 적용된다”고 말했다. 출범을 앞두고 있는 5ㆍ18진상규명위에서 다시 조사를 해도 되지만, 사실 지금까지 쌓인 증거를 토대로 검찰이 바로 수사해서 처벌도 가능한 셈이다.

김 소령은 본보와의 접촉은 피했지만, 지난 5월 방송된 SBS 프로그램 제작진에겐 “5ㆍ18이 30년이 넘었는데, 그럼 60년 넘은 6ㆍ25까지 캐야 하느냐, 말도 안 된다”고 했다. 포도농장에 위치한 김 소령의 주택은 비어 있은 지 조금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마을 주민에 따르면 김 소령의 부인과 가족은 논산시내에 살고 있고, 그는 포도농장 외에도 머물 곳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농장도 등기부 등본에 따르면 김 소령이 아닌 형제로 추정되는 사람의 명의로 돼 있었다.

국방부는 그의 나이가 ‘개인정보’라며 알려주지 않았는데, 고령을 감안하면 김 소령을 처벌할 시간도 많지 않아 보인다. 국방부는 5ㆍ18당시 11공수여단의 소령급 이상 간부 명단에 대해 정보공개청구를 했을 때도 ‘정보부존재’라고 그런 자료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 통보했다. ‘정보부존재’ 통지는 ‘정보비공개결정통지’에 해당되지 않으므로 정보공개 불복절차 중 ‘이의신청’을 제기할 수 없다고도 덧붙였다.

이진희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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