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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털이 자유로울 자유

입력
2018.10.11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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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기자가 되고 겪은 가장 유치한 사건을 소개하겠다. 두 달 차 수습기자 때였다. 회사 여자 선배가 화장실로 불렀다. “어디서 그렇게 머리를 치렁치렁 기르고 다니니? 여기자 망신은 네가 다 시키는구나. 그 머리 다시 내 눈에 띄면 가만 안 둬!” 여기자는 무성의 존재여야 하므로 여성성을 들키지 않도록 머리카락 같은 건 짧게 잘라버려야 한다는 것, 선배의 굳은 믿음이었다.

남자 선배가 그 얘기를 듣고 화를 냈다. “머리 자르면 너 가만 안 둬!” 깨인 사람이라 그랬다면 위로가 됐으련만, 그 선배는 여자 선배와 앙숙이었다. 선배 둘이 내 머리에 난 내 털을 놓고 싸우는 꼴이 됐다. 울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남자 선배에게 줄을 섰다. “좋은 세상이야, 수습이 미용실도 다니고.” 그런 타박을 듣기 싫어 그냥 지내기로 했다. 여자 선배 피해 다니느라 한동안 고생했다. 내 인생이 나의 것이듯, 내 머리털은 나의 것이다. 어른이 돼서도 그 당연한 걸 무시당할 줄 몰랐다.

그게 20년 전쯤 일이다. 머리털에 관한 한, 세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얼마 전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내년 2학기부터 서울 중∙고등학교 두발 규제를 없애겠다고 했다. 길이 규제는 완전히 풀고 염색과 파마 규제는 학교구성원이 논의해 되도록 풀라고 했다. 야단이 벌어졌다. 언론부터 난리였다. ‘MBC 100분 토론’을 비롯한 시사 방송 프로그램에서 찬반 토론을 붙였다. 압권은 한 전문기관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보도였다. ‘나이, 성별, 거주지역, 정치성향 등에 따른 두발 규제 폐지 찬반 여부’를 상세히 분석한 보도를 보면서 궁금했다. 도대체, 털이란 무엇이기에.

학생 두발 규제는 일제와 독재정권의 유산이다. 권력자들이 통제한 진짜 대상은 털이 아니었다. ‘정신 상태’였다. ‘여학생은 귀밑 2㎝ 단발, 남학생은 삭발에 가까운 반삭’ 같은 이상한 교칙마저 열심히 지키는 착한 학생, 미래의 온순한 사회구성원이 되라는 명령이고 훈련이었다. 또한 털은 학생은 감히 발산해선 안 되는 욕망이었다. 열정은 오직 학업에 쏟아 앞날을 밝혀야 했다. 중학생 때 머리털이 0.3㎝ 더 자라난 죄로 무릎 꿇고 앉아 체육선생님에게 발길질을 당한 적이 있다. 그는 나와 내 부모님과 대한민국에 좋은 일을 한다고 뿌듯해했을 거다.

털은 그냥 털이다. 몸의 외피를 보호하는 게 의학사전이 설명하는 털의 기능이다. 두피 힘을 끌어모은다고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거니와, 성적도 머리가 단정한 순이 아니다. 학생들이 무지개색 레게 머리를 한다고 창의력이 치솟지는 않을 거다. 반대로 멍청하거나 위험해지지도 않을 거다. 그들은 머리털에서 반항하는 괴력이 나오는 삼손이 아니다. 타인의 자유와 취향을 제어할 수 있다는 발상이 2018년도에도 유효하다니, 참으로 후지다.

어른의 머리털이라고 해서 자유롭지도 않다. 털엔 정체 불명의 ‘○○다움’이 투영된다. 국가대표 운동선수가 요란한 머리를 하고 경기장에 나타나는 건 얼마 전까지 욕먹을 일이었다. “운동만 해도 모자랄 판에, 훈련비로 내 세금도 들어가는데…” 여성 아나운서다운 머리, 스튜어디스다운 머리, 백화점 판매원다운 머리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여자는 꽃이지! 보기 좋아야지!”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에선 취약한 사람일수록 고통받는다. 여성이, 을들이 털로부터 덜 자유로운 게 그 증거다.

나도 그다지 용감하지 않다. 몸 여러 부위의 털을 정기적으로 뽑거나 깎는다. 1년째 기르고 있는 머리가 기자답지 않아 보일까 걱정도 한다. 이 글을 쓰고도 겨드랑이 털을 기르진 못할 거다. 스스로 말끔하기 위해, 쾌적하기 위해, 기능적이기 위해 털을 자르고 밀고 볶는 건 자유다. 딱 거기까지다. 사람답기 위해 어떠해야만 하는 털은 없다.

최문선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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