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초기 천주교 사료 ‘만천유고’ ‘성교요지’는 일제강점기 위작이다

입력
2018.10.11 04:40
28면
0 0

 정민의 다산독본 <32> 악마의 편집 ‘만천유고’ 

이승훈의 문집 '만천유고'에 들어있는 한시 '만천시고' 가운데 일부. 이벽에게 주는 시가 나오는 대목인데, 이 뒤편 시들은 모두 병인양요로 유명한 장수 양헌수의 시집에서 훔쳐 온 것이다. 누가 왜 이렇게 책을 만들었을까. 연구대상이다.
이승훈의 문집 '만천유고'에 들어있는 한시 '만천시고' 가운데 일부. 이벽에게 주는 시가 나오는 대목인데, 이 뒤편 시들은 모두 병인양요로 유명한 장수 양헌수의 시집에서 훔쳐 온 것이다. 누가 왜 이렇게 책을 만들었을까. 연구대상이다.

 ◇감금 상태의 이승훈 

1789년과 1790년에 북경으로 보낸 이승훈의 편지가 이승훈 자신이 쓰기 어려웠다는 정황은 또 있다. 윤유일이 북경 체류 중 세례를 받을 때 대부였던 빤지 수사는 1790년 11월 11일(양력)에 마카오의 포교성 장관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글에서 빤지 수사는 “그(이승훈)의 아버지는 그가 많은 사람에게 영세를 준 것을 불만스럽게 여겨 그를 감옥과 같은 곳에 가두었고, 현재까지 그를 계속 가두고 있다고 합니다”라고 썼다. 윤유일과의 필담 내용을 전한 것이다.

이 글에 따르면 1789년 윤유일의 출국 당시까지 이승훈은 부친 이동욱에 의해 감금 상태에 놓여 감시받고 있었다. 1788년 9월 초 다산이 계산촌으로 이승훈을 찾아갔던 것도 이 감금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연금 상태에서 감시를 받던 처지의 이승훈이 조선 교회를 대표해 북경에 서신을 보낼 형편이 못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빤지 수사의 편지는 당시 북경 교회에서 이승훈의 편지가 대필이었음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지막 공초에서 이승훈이 북경으로 보낸 편지가 정약용이 자신의 이름을 무단으로 써서 보낸 것이라고 한 것은, 단순한 발뺌이나 책임 전가이기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초기 천주교회 사료 속의 ‘만천유고’ 

한편 이승훈의 문집 ‘만천유고(蔓川遺稿)’란 책이 있다. 만천은 이승훈의 호로, 지금의 서울역 인근인 도저동 지역을 흐르던 샛강이다. 이동욱의 서울 집이 이 근처에 있었다. ‘만천유고’는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앞뒤로 천주가사와 기타 잡기가 실려 있고, 중간에 ‘만천시고(蔓川詩藁)’라 하여 이승훈의 한시 70수가 수록된 필사본이다. 이 책의 존재는 1967년 8월 27일자 가톨릭시보 제 582호 기사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이승훈의 책 '만천유고'의 존재를 처음 알린 1967년 8월 27일 카톨릭시보의 보도.
이승훈의 책 '만천유고'의 존재를 처음 알린 1967년 8월 27일 카톨릭시보의 보도.

당시 김양선 목사가 수집해 숭실대에 기증한 초기 천주교회사 관련 자료는 모두 12종이었다. ‘만천유고’는 그 중 하나였다. 이 책 속에 이벽이 지었다는 ‘성교요지(聖敎要旨)’가 들어 있었다. ‘성교요지’는 시경체의 장편 4언 고시로 복음과 천주교의 교리를 압축해 소개하고, 주석까지 단 놀라운 내용이었다. ‘성교요지’의 한글본도 따로 나왔다.

그간 ‘만천유고’에 실린 ‘성교요지’는 교회사 연구 초기부터 주목받아 이를 주제로 박사가 여럿 배출되었고, 이를 풀이한 단행본만 해도 여러 종류다. 하지만 ‘만천유고’의 주인공이라 할 이승훈의 한시 70수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서종태 교수는 2016년 6월 16일, 수원교구에서 개최한 ‘만천유고’와 ‘성교요지’ 관련 심포지엄에서 ‘만천시고’에 수록된 70수 중 이승훈의 저작으로 단정할 수 있는 시가 단 한 편도 없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홍석기(洪錫箕ㆍ1606~1680)의 ‘만주유집(晩洲遺集)’에 버젓이 실린 두 수의 시가 슬쩍 끼어든 것까지 찾아냈다. 게다가 여타 작품 속에는 20대 후반의 이승훈이 지은 것으로 볼 수 없는 노년의 심회를 표출한 작품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악마의 편집 

결론부터 말해 이 시집은 의도적으로 여러 사람의 시집을 짜깁기해서 엮은, 대단히 교활한 악마의 편집이다. 이승훈의 한시는 단 한 수도 없다. 필자가 확인해보니, 시고 70수 중 뒷부분에 수록된 ‘계상독좌(溪上獨坐)’부터 마지막 ‘양협노중(楊峽路中)’에 이르기까지 무려 21제 26수가 통째로 양헌수(梁憲洙ㆍ1816~1888) 장군의 ‘하거집(荷居集)’ 권 4에서 가져왔다. 양헌수는 1866년 병인양요 때 정족산성 수성장(守城將)으로 프랑스군을 패퇴시켰던 무장이다. 이승훈이 죽고 15년 뒤에 태어난 양헌수의 시가 통째로 이승훈의 작품으로 끼어들었다.

‘만천시고’에는 ‘밤에 이덕조와 함께 달 구경을 하다가 당시 절구의 운을 차운하여 짓다(夜與李德操玩月次唐絶韻)’ 2수가 실려 있다. 이벽이 아직 살아 있을 때 함께 달 구경을 하며 지은 시다. 하지만 ‘하거집’에는 이 작품의 제목이 ‘밤에 취정 이문경 복우와 더불어 달 구경을 하다가 당시 절구의 운자를 차운하여 짓다(夜與翠庭李聞慶福愚玩月次唐絶韻)’로 나온다. 사람 이름만 슬쩍 바꿔 치기 했다.

이 뿐만 아니라 다산의 고향집 인근의 우천(牛川)과 마현(馬峴), 양협(楊峽) 등의 지명이 등장하는 시를 배치하여 이승훈의 시임을 의심치 못하게 했다.

 ◇발문 속 무극관인의 정체 

‘만천유고’ 끝에 무극관인(無極觀人)이란 이가 쓴 발문이 실려 있다. 발문은 이렇다.

“평생 옥에 갇혔다가 세상에 나와 죽음을 면한 것이 30여 해이다. 강산은 의구하고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은 그림자가 변함없건만, 선현과 지구(知舊)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목석 같이 겉도는 신세로 거꾸러진 처지 가운데 전전하고 있다. 아!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떠난 만천공의 행적과 여문(儷文)이 적지 않았으나, 불행하게도 불에 타버려 원고 하나도 얻어 볼 수가 없었다. 천만 뜻밖에 시고와 잡록 등의 조각 글이 있는지라, 못 쓰는 글씨로 베껴 쓰고는 ‘만천유고’라 하였다. 봄바람에 언 땅이 녹고, 마른 나무가 봄을 만나 새싹이 소생하는 격이라고나 할까? 이 또한 하느님(上主)의 광대무변한 섭리이다. 우주의 진리가 이와 같고, 태극이 무극이 되니, 깨달은 자는 이로써 하느님의 뜻을 이을진저. 무극관인.”

무극관인은 앞선 여러 연구자들이 다산 정약용이 틀림없다고 특정했다. 이 글은 의도적으로 다산이 쓴 것처럼 보이게 하려 애를 썼다. 옥에 갇혔다 죽음을 면하고 살아남아 30여년을 살았고, 이승훈과 막역한 사이였으며, 하느님의 광대무변한 섭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다산 외에 다른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한문 문장이 어설프기 짝이 없다. 게다가 양헌수의 ‘하서집’을 베낀 것이 드러난 이상 무극관인의 발문은 당연히 터무니없는 가짜다.

결론적으로 이승훈의 ‘만천유고’ 속 ‘만천시고’는 전체 70수 중 절반 가량이 다른 사람의 시를 절취해온 가짜 시집이다. 나머지 밝혀지지 않은 작품도 경기 용인과 광주 인근에 살던 문인의 문집에서 베껴온 것임에 틀림없다. 나머지 부분의 원작자가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본다. 떠들썩한 등장과 눈부신 조명에 비해 그 끝이 너무 허망하다.

 ◇허점투성이의 가짜 

그간 천주교회 내부에서도 ‘만천유고’와 ‘성교요지’의 위작설에 대한 문제 제기는 꾸준히 있어 왔다. 2014년 윤민구 신부가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쟁점연구’(국학자료원)란 책에서 김양선 목사가 일제 강점기에 구입해 보관하다가 기증한 ‘만천유고’와 ‘니벽(이벽)전’ ‘유한당언행실록’ 등의 저술들이 모두 가짜임을 밝혔다. 입론과 논거가 타당해 이론의 여지가 없다.

‘만천유고’에 실린 자료 중 유일하게 이승훈의 작품인 시고 속 한시 70수와 발문이 날조된 가짜인 이상, 여기에 수록된 ‘성교요지’와 천주가사를 비롯해, 당시 김양선 목사가 수집한 초기천주교회사 관련 사료는 전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가짜로 보는 것이 순리다. 이 부분은 좀더 섬세한 논의가 필요하므로 이 짧은 글에서는 자세히 논하기 어렵다.

이중 한글소설 ‘니벽젼’은 주인공이 이벽이다. 이 소설은 종말론과 재림예수 신앙이 녹아 든 말 그대로 근세 시기 종말신앙의 산물이다. 소설의 구성과 내용이 미륵하생이나 후천개벽을 말하는 일제 강점기 유사종교의 화법과 흡사하다. 어디까지나 소설이니 이것을 역사 사실과 혼동하면 절대로 안 된다. 소설의 필사자로 등장하는 정학술(丁學述)은 다산의 아들대인 학(學)자 돌림 인물인 것처럼 꾸몄지만, 이 역시 날조된 허구 가공의 인물일 뿐이다.

이들 위작은 도처에 허점투성이다. 같은 컬렉션 속에 들어있는 이벽과 그 부인의 영세 명패가 있다. 소위 그 명패에는 ‘이약망벽(李若望檗)’으로 새겼다. 이벽의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이다. 한자로는 약한(若翰)으로 써야 맞다. 사도 요한은 구분을 위해 한자로 약망(若望)이라 적는다. 이벽은 약한인데 혼동해서 약망으로 잘못 썼다.

대체 누가 무슨 의도에서 이 같은 가짜 세트를 만들었을까? 이것은 흥미로운 연구 주제다. 1930년대 유난히 기승을 떨던 유사종교 집단과 무관치 않다. 토착 신앙뿐 아니라 메시아니즘의 치장을 두른 정감록 계통 신앙 전파 세력과도 모종의 관련이 있으리라고 본다. 단지 돈 몇 푼을 벌자고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별도의 깊은 연구가 요구된다.

 ◇다산의 가짜 인장 

다산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88년 10월 12일 모 일간지에 다산 인장 26점의 발굴 기사가 대서특필 되었다. 추사의 제자 오규일의 각으로, 큰 것은 돌 하나에 140㎏이나 나가는 것도 있다고 했다. 새겨진 인문(印文)은 ‘천주(天主)’를 비롯해 ‘정약용약한(丁若鏞約翰)’, ‘정씨약한(丁氏約翰)’ 등 천주교와 관련된 것들이 많았다. 측면에는 성모 마리아상까지 새겨놓았다. 다산 사후에 오규일이 다산 선생을 기려서 팠다고 하는데, 죽은 사람의 인장을 새기는 법도 있던가?

다산의 인장이 대거 발견됐다는 소식을 전한 1988년 10월 12일자 조선일보 지면. 하지만 이 인장들은 가짜로, 조선시대가 아니라 1980년대초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산의 인장이 대거 발견됐다는 소식을 전한 1988년 10월 12일자 조선일보 지면. 하지만 이 인장들은 가짜로, 조선시대가 아니라 1980년대초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산 인장이라고 주장된 인장들. 성모 마리아상까지 새겨 넣는 등 그럴 듯 하게 꾸몄으나 다산을 요한이란 의미의 '약망'이 아니라 '약한'으로 잘못 파뒀다. 위작이라는 의미다.
다산 인장이라고 주장된 인장들. 성모 마리아상까지 새겨 넣는 등 그럴 듯 하게 꾸몄으나 다산을 요한이란 의미의 '약망'이 아니라 '약한'으로 잘못 파뒀다. 위작이라는 의미다.

여기서도 결국 약망에서 꼬리가 밟혔다. 다산의 본명은 요한, 즉 약망(若望)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개신교 성경의 표기를 따르는 바람에 약한(約翰)으로 잘못 새겼다. 그 결과, 생각 없이 만든 가짜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천진암(天眞庵)’이라 새긴 인장까지 포함된 것으로 보아 이들 인장은 천진암 성지가 개발되던 1980년대 초에 만들어진 것이다.

가짜 책, 가짜 인장으로 역사를 조작할 수 없다. 특별히 ‘만천유고’와 그 가운데 실린 ‘성교요지’는 그간 너무 소모적인 논쟁을 야기시켰다. 이 책이 나온 1930년대에는 대종교 계통의 ‘규원사화(葵園史話)’와 ‘환단고기(桓檀古記)’, 유교 쪽의 ‘화해사전(華海師傳)’, 그밖에 수많은 위서들이 출현했다. 이들 책 또한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개중에는 이제껏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