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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Dear Eugene

입력
2018.10.07 18:22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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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 편안하신지요?

당신이 떠나시고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백여 년. 그 사이 조선에는 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늘 옳은 쪽으로 향하던 당신의 발걸음과 총구 덕분에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조선은 결국 망했습니다. 어차피 정해진 방향이었기에 누구 힘으로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조선의 많은 힘 있는 사람들에 의해 더 빨리 망하는 쪽으로 일은 진행됐습니다. 그 고통과 비극은 고스란히 힘없는 민초들의 몫으로 돌아왔습니다.

일본의 패배로 전쟁이 끝나고 당신의 염원대로 독립된 조국을 가지게 됐으나 스스로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에 결코 더 적지 않은 비극들이 이어졌습니다. 힘 있는 다른 국가들에 의해 남과 북으로 분단이 됐고, 서로 다른 이념과 정치를 가진 두 개의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있었습니다. 더 망할 것이 없어 보였던 조선을 이은 이 땅은 그야말로 비극의 현장으로 변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다행히 두 나라 중 한 나라는 눈부신 성장과 성공 스토리를 써 나갔습니다. ‘불란셔 제빵소’보다 더 맛있는 사탕과 빵을 만드는 곳들이 여럿 생겼고, ‘글로리호텔’에서만 맛볼 수 있던 가베를 파는 가게들을 도시 건물 한집 건너 하나씩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 이방인으로서 외롭게 걸었을 맨해튼 중심가에는 우리가 만든 신기한 물건들을 파는 광고판이 자랑스럽게 걸리기도 했습니다. 우리 소년 여럿이 함께 부른 신나는 노래가 미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1등으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몇 일전 뉴스에는 카일이 ‘해드리오’에서 한 장 내밀고 여러 가마니 옆전으로 바꾸어갔던 미국 달러를 우리가 전세계에서 8번째로 많이 갖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직접 와서 볼 수 있으면 참으로 좋을텐데요.

모든 것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역시 또 많은 것들은 조선의 마지막과 흡사하게 닮아있기도 합니다.

아직도 우리는 외부의 적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내부의 정적에 대해서는 잔인하리만큼 가혹합니다. 그 시절에 성리학적 명분을 놓고 당파를 짓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싸움을 했던 것처럼 지금도 이념적 지향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는 추호도 타협의 여지를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조선이 그와 같이 망하는 길로 가지 않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실사구시의 사고방식과 개방적 태도는 아직도 많은 경우에 도덕주의에 의해 배격되곤 합니다. 미안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도덕주의는 대부분 위선적입니다. 냉철하고 과학적인 현실인식에 바탕을 둔 합리적 판단의 과정보다는 감정적이고 선동적인 구호들이 논의의 방향을 결정하는 일이 자주 반복됩니다.

그 시절에 조선과 함께 망하는 길에 동참했던 중국은 극적인 과정을 거쳐 지금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과 대등한 힘을 겨루는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한 때, 가치 있는 자원의 생산과 분배를 국가가 주도하고 그 배분의 결과가 균등할 것을 지향하는 이념이 광풍처럼 세상을 휩쓸었다가 모두 실패로 이어졌습니다. 그 이후 국가의 번영과 발전은 민주주의 속에서 시민적 자유권의 보호와 함께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중국의 그와 같은 성장과 부각은 어딘가 당황스럽습니다.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 민족은 매우 양립할 수 없는 서로 다른 두 가치체계 사이에서의 선택을 다시 강요당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부를 전한다는 것이 무거운 주제로 흘렀습니다.

생각해보면 조선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제대로 된 시스템으로 대응하고 승리하기 보다는 또 다른 외부세력의 힘을 빌거나 이름 모를 의병들에게 지나치게 많이 의존했었던 것 같습니다. 부디 앞으로 이 땅에서는 당신의 비극적인 히스토리와 슬픈 러브스토리가 다른 ‘유진’들에게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입니다.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허성욱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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