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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5ㆍ18과 택시운전사 김사복

입력
2018.09.1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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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반듯하게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이지만 1980년 당시나 그 후 상당 기간 동안은 ‘광주폭동’이요, ‘광주사태’요, ‘광주내란’이라는 무서운 이름으로 매도당하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 나는 폭동의 ‘두목’이요, 내란의 ‘수괴’라는 엄청난 죄목 때문에 죽을힘을 다해 도망 다니느라 온갖 고생을 겪었던 경험이 있다. 하늘이 도와주고 우리 선조들의 영혼이 도와준 덕택으로 당시 1계급 특진과 현상금 500만 원이라는 수배전단의 엄중한 포위망을 뚫고, 80년 12월 고등군재가 조작한 시나리오대로 끝나던 때까지 체포되지 않았다. 나는 그 뒤에 체포되어 허위로 조작된 내란과 폭동의 수괴에서 벗어나 내란 방조죄로 감옥에 있다가 오래지 않아 석방되어 나왔다.

지금은 5ㆍ18민주화유공자의 한 사람으로 5ㆍ18의 진상이 정확하게 밝혀지고 그런 민간인 학살 책임자들은 응분의 죗값을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진실 규명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던 가운데 지난 2017년 8월 2일 개봉된 ‘택시운전사’라는 영화를 관람한 뒤부터 독일 제일공영방송의 기자였던 힌츠페터(Jorgen Hinzpeter: 1937∼2016)씨와 한국인 택시운전사 김사복(1932∼1984)씨에 대한 내용을 알게 되면서 새로운 일이 하나 더 생겼다. 영화에서 큰 역할을 하던 힌츠페터씨는 광주의 망월동 광주희생자 묘역에 안장되었는데, 김사복씨는 그렇지 않아 새롭게 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배우 송광호의 역이던 김사복씨는 돈을 벌기 위해 기자를 태운 것도, 한차례만 광주에 진입한 것도 아니다. 그 해 5월 20,21일 광주 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온 힌츠페터씨는 동경에다 필름을 전해주고 22일 한국에 다시 들어온 뒤 23일 함께 두 번째로 전쟁터로 진입하였다. 이런 사실은 힌츠페터의 글인 ‘광주봉기(The Kwangju Uprising)’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김사복씨는 요금만 받으려는 그냥 택시기사가 아니었고, 무자비한 광주학살의 진실을 외국인 기자를 통해 세계에 알리려는 굳은 신념 때문에 그런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두 차례나 기자를 태우고 사선을 넘어 광주에 진입하였음이 밝혀져 있다.

더 명확한 사실은 영화가 방영된 뒤에 힌츠페터씨가 그렇게 찾고자 했던 김사복씨는 84년에 광주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암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다행히 그의 아들 김승필이 나타나 힌츠페터의 부인과도 만나고, 광주유공자들과도 만나면서 김사복씨에 대한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김사복씨는 함경남도 원산 태생으로 어려서 부산으로 월남하여 강릉상고를 졸업하고 강릉 처녀와 결혼하였다. 부산 동아대를 다녔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은 안 된다고 가족들은 말한다. 1967년 상경하여 서울에서 두 아들을 키우며 서울 사람이 되었고 택시운전사이자 택시업체를 운영한 사장이기도 하였다.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하여 외국인 전용 기사로 활동했다고 한다.

유신시절 국내의 언론은 재갈에 물려 진실을 보도하지 못할 때, 외국기자들과 자주 접촉하던 김사복씨는 당시 민주화 운동의 거목이던 함석헌ㆍ장준하 등에게 외국기자들에게 들은 국내소식을 전하면서 함께 민주화운동가로서의 역할도 했었다. 그러한 생각과 의식이 뚜렷했기 때문에 사선을 뚫고 기자와 함께 광주로 들어가 한국말과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여 외국기자의 취재에 절대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힌츠페터가 없어서도 진실은 세계에 알려질 수 없었겠지만, 김사복씨가 아니었다면 광주진입도 불가능했고 정확한 취재 또한 불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광주의 실상이 독일방송을 통해 전 세계로 알려지지 않았다면 광주의 진실이 어떻게 밝혀질 수 있었겠는가. 지금도 극우파 사람들은 광주운동은 북한군이 내려와 일으켰느니 폭도들끼리 싸우느라 사상자가 나왔지 계엄군이 양민을 학살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때의 생생한 방송내용이 없었다면, 우리 광주 관련자들의 힘으로 어떻게 무자비한 군인들의 주장을 반박할 길이 있었겠는가. 참으로 끔찍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다시 한 번 힌츠페터와 김사복씨의 위대한 기자정신과 민주주의 정신에 머리 숙여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택시기사의 아들 김승필은 영화에서 아버지가 왜곡되게 표현된 것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면서 몇몇 인사들과 ‘김사복 선생 추모사업회’를 조직했다. 그분의 일생을 세상에 정확하게 알려 힌츠페터와 함께 망월동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광주시민이나 5ㆍ18관련자들이라면 그 두 분의 뜨거운 인간애와 민주의식을 높이 찬양하며 감사의 뜻을 지녀야 한다. 그렇게 만나보고 싶어 하다 그냥 눈을 감아버린 힌츠페터의 무덤 곁에 김사복씨의 무덤이 나란히 안장되는 일에 우리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뜻을 밝힌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ㆍ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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