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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철의 프레임] DNA는 운명이 아니다

입력
2017.07.27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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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인간은 죽는다. 이보다 더 명확한 사실이 있을까. 오히려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 그 자체는 우리를 아주 불안하게 하지는 않는다. 살아가는 과정이 어찌 보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에 잘 대처하도록 훈련되어 있다.

그러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이유로 죽을지를 모른다. 병으로 죽게 될지, 병이라면 어떤 병으로 죽게 될지, 사고로 죽게 될지, 사고라면 어떤 사고일지, 자는 도중에 깨어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중환자실에서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죽음이 임박한 시점이 되어서야 죽음의 원인을 알게 된다는 이 불확실성이야말로,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는 확실성과 함께 인간의 의식과 사고방식을 뿌리 깊게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을 찾았다. 그들은 ‘피티아’라는 여사제가 흡사 환각 상태에 빠진 것 같은 상태에서 읊조리는 암호와 같은 예언 속에 자신의 미래가 담겨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피티아의 예언을 해석해주는 사제들에게 많은 금전과 정성을 바치면서 그들의 운명이 해독되기를 염원했다.

현대판 피티아 신봉자들을 곳곳에서 관찰할 수 있다. 사소하게는 혈액형 속에 자신의 성격에 대한 운명의 코드가 새겨져 있다고 믿고, 마치 하늘의 비밀이라도 풀어내려는 듯이 서로의 혈액형을 묻는 사람들에서부터, 손가락의 상대적 길이가 성적 지향을 결정하는 숨겨진 열쇠라도 되는 양 사람들의 손가락을 유심히 쳐다보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현대판 피티아의 최고봉은 역시 유전자 분석이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로 인해 급부상한 이 피티아는 유전자를 분석하면 개인의 질병을 예측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개인의 지능, 성격, 행복 등에 관한 운명까지 알 수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심리학자 스티븐 하이네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유전자 분석이 이미 유행하기 시작한 서구에서는 피티아의 신탁을 숨죽여 기다렸던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자신들의 유전자 분석 결과를 신탁처럼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자신에게 운명 지어진 유방암의 단초를 아예 없애기 위해 자신의 가슴을 미리 제거한 이도 있다. 이에 더하여 언론 매체는 연일 ‘우울증 유전자 발견’ ‘행복 유전자 발견’ ‘비만 유전자 발견’과 같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유전적 결정론에 관한 연구 성과들을 소개하고 있다. 마치 특정 질병이나 특정 특성과 일 대 일로 매칭되는 특정 유전자가 존재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 분야의 많은 전문가와 연구들이 경고하듯이, 특정 질병과 특정 특성이 특정 유전자에 의해 단독으로 결정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뿐 아니라, 특정 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라고 밝혀진 경우에도 그 유전자가 그 질병 외의 다른 많은 현상들에 동시에 관여된 경우가 많다. 더 중요한 점은, 어떤 유전자가 구체적인 질병이나 행동으로 발현되는 과정에는 수많은 환경적 요인이 깊이 관여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가 처한 환경에 상관없이 종국엔 특정 질병이나 특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따라서 유전자 정보를 분석하는 것은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미래를 알려주는 무오류의 신탁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전적 결정론이 빠른 속도로 우리 사회에 퍼지고 있는 점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거의 모든 행동에는 유전이 관여한다. 그러나 관여한다는 말이 결정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유전적 결정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결국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운명론을 받아들이기 쉽다. 또한 인종 차이나 성별 차이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서, 차이를 뛰어넘고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개인적, 사회적 노력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볼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열등한 유전자를 지녔다고 판단되는 집단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위험까지도 만들어낼 수 있다.

어떤 특성이 유전에 의해 설명되는 정도(유전율, heritability)는 그 특성이 노력이나 환경에 의해 변화될 수 있는 정도(변화 가능성, modifiability)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개념이다. 인간의 키는 유전율이 가장 강한 특성 중 하나다. 그러나 세대별 평균 키는 계속 커지고 있다. 심지어 우리나라 여성은 지난 100년간 세계 여느 나라 여성보다도 평균 키가 가장 많이 자랐고, 우리나라 남성은 세 번째로 키가 많이 자랐다. 유전율과 변화 가능성이 이처럼 관계가 없음에도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일부 학자들도, 이 둘을 혼동하여 불필요한 운명론적 시각에 사로잡혀 있다.

금수저, 흙수저 논쟁 같은 계층 결정론도 위험하지만, 생물학적 결정론 역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운명론적 생각이다. 종국엔 인류가 멸망한다는 디스토피아적 신탁이 들려온다 해도, 지금보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기 위한 인간과 사회의 노력이 운명에 굴복할 리 없듯이, 원래부터 그렇게 태어났다는 유전적 결정론에도 결코 굴복할 수 없는 것이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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