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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인터뷰] “여성들의 불안, 좀 불편해도 피해자 시선으로 보라”

입력
2016.06.1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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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의 변호사는 "차별 당하는 약자의 비명을 불편해도 경청하는 사회분위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고영권기자youngkoh@hankookilbo.com
이은의 변호사는 "차별 당하는 약자의 비명을 불편해도 경청하는 사회분위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고영권기자youngkoh@hankookilbo.com

강남 살인사건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남성의 여성에 대한 폭력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아직도 많은 남성이 ‘분위기를 밝게 하기 위한 농담’이라며 혹은 ‘상대 여성이 말로는 거부하지만 내심 원하고 있다’며 별 죄의식 없이 여성에게 언어적 물리적 폭력을 반복한다. 이런 풍조는 사실 종교나 인종 경제 수준의 차이에 상관없이 정도의 차이일 뿐 전세계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가해 남성이나 피해 여성 모두 문제의식을 느끼기 힘들다. 하지만 강남 살인사건을 계기로 ‘더 이상 참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사회적 공감을 얻게 됐다. 이런 시점에서 최근 ‘예민해도 괜찮아-불쾌한 터치와 막말에 분노하는 당신을 위한 따뜻한 직설’(북스코프)이라는 책을 낸 이은의(42) 변호사의 얘기를 듣기 위해 서울 서초동의 이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이 변호사는 1990년대 말 평범한 대기업 회사원에서 상사의 성희롱을 참지 못하고 정면으로 맞서다 그 기업의 ‘문제 사원’이 됐고, 혼자 법정투쟁을 벌여 결국 승소하고, 그런 시련을 계기로 법조인이 된 당차고 유쾌하고 따뜻한 ‘비혼 여성’이다.

_강남 살인사건에 대한 일부 남성들의 반응은, 정신병력이 있는 개인이 벌인 예외적 사건을 지나치게 구조적 문제인 양 과장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정신병자의 소행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또 범인이 조현병이 심하지 않은데 형량을 줄이려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이 사건을 기폭제로 터져 나오는 여러 목소리의 배경을 들여다봐야 한다. 여성이면 누구나 일상에서 겪어야 하는 남성들의 폭력이 있다. 개인적으로 그런 폭력은 변호사가 된 후에도 계속됐다. 지금 맡고 있는 사건의 증인은 법정에서 내게 위협적인 말투로 소리를 지르고, 심지어 전화로 협박한다. 내가 체격이 큰 남자변호사라면 그렇게 했을까. 주로 성폭행 사건을 많이 맡다 보니 피의자들이 대부분 남자다.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변호사 사무실에 남자 직원만 둔다.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를 괴롭히면 남자아이를 꾸짖기보다는 여자아이에게 ‘너를 좋아해서 그런 거야’라며 참으라고 말하는 문화가 문제의 뿌리다. 여자가 느끼는 불안감은 남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그런데도 ‘여자들이 불안하다고 말하면 남자들이 불편하니까 입을 다물라’는 반응이 적지 않다. 이 사건의 직접 원인이 여성혐오(여혐)가 아니라면 어떤가. 이 사건을 기폭제로 여성의 불안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는 건데 왜 못하게 하나. 여성들은 그동안 수없이 많이 당하면서도 말 못하고 지냈다. 이제 남성들이 어느 정도의 불편함을 참으며 여성의 분노에 귀를 기울일 때다.”

이은의 변호사. 고영권 기자 youngkoh@hankookilbo.com
이은의 변호사. 고영권 기자 youngkoh@hankookilbo.com

_또 일각의 지식인들은 강남 살인사건의 근본적 원인은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라면서 성차별이나 성대결로만 조명하면 문제의 본질이 가려진다고 주장한다.

“경제적 불평등이 여혐의 원인 중 하나라는 점은 동의한다.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일베) 회원 중 많은 이들은 원래부터 여성혐오주의자가 아니라 여성에게 관심을 받지 못한 부적응자일 수 있다. 실제 일베 회원을 만난 적이 있는데, 굉장히 수줍음이 많은 친구였다. 물론 여성혐오자 전부가 경제적 약자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 중 사회에서 억압받고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다수라는 건 분명하다. 한국의 양극화는 이렇게 사회 전반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 강남 살인사건도 경제 불평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문제를 근본 이유가 이거라면서 다른 문제를 얘기하지 말라고 하는 건 옳지 못하다. 설사 강남 사건의 원인이 경제적 약자의 비뚤어진 불만이라 하더라도 그 폭력의 희생자는 노인, 아동,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집중된다. 공격의 원래 이유가 사회적 불만이니 사회적 약자들이 공격 받고 있는 현실은 중요하지 않거나 덜 중요하다는 건가. 둘 다 함께 이야기하면 된다. 이런 이야기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문제다. 왜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강남 사건의 피해자는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담론의 장을 제공해줬다고 생각한다. 피해자가 우리일 수 있다고 공감하며 피해자의 죽음에 이입하는 여성과 달리 남성들은 주로 가해자에 이입해서 보기 때문에 이런 논쟁이 생겼다. 하지만 이 논쟁을 통해 뿌리 깊지만 외면해오던 문제의 해결 가능성도 생긴 거다. 시선을 돌리는 방향에 따라 담론도 다르게 나온다고 생각한다.”

_책에서 성희롱ㆍ성폭력 피해자가 오히려 자책감이 들게 만드는 사회구조에 대해 지적한 부분이 눈길을 끌었다.

“성폭력 관련 의뢰자는 주위에서 아무도 그를 보듬어주지 않기 때문에 사건이 어느 정도 정리돼 변호인이 의뢰인과 거리감을 두게 되면 서운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 사회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오히려 상처를 주고 자책하게 만드는 구조다. 피고인 측 변호사는 물론 죄를 물어야 할 검사나 주위 사람마저 ‘그러게 왜 그 사람과 술을 마셨냐, 지난번에도 그랬다면서’라는 식으로 책임의 일부를 피해자에게 묻는다. 법조인 중에는 보수적이고 가부장적 보호와 비호 아래 자란 사람이 많다. 그러니 그런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갖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얼마 전 맡은 사건 중에 차 안에서 일어난 강간 사건이 있었는데, 판사가 ‘좁은 차 안에서 강간이 가능해?’라고 물었다. 또 ‘피해자가 당시 상황을 너무 자세하게 진술하는데 흥분 상태에서 그렇게 자세하게 기억한다는 게 가능해?’라고도 했다. 피고인 변호사는 더 심하다. 강간 충격으로 자살을 시도했던 피해자에게 ‘동맥이 어디인지 잘 아는 사람이 정맥을 끊은 이유가 뭐냐, 죽을 생각이 없었던 거 아니냐’고 5분 넘게 추궁하고, 그런 비인간적 질문이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이어지는 게 현재 법정의 현실이다. 공개적인 법정에서 이런 발언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다면 비밀스러운 수사기관에서는 더 심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피해자가 그 모든 수모를 겪으며 재판정까지 왔다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겠나. 자책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이은의 변호사. 고영권 기자 youngkoh@hankookilbo.com
이은의 변호사. 고영권 기자 youngkoh@hankookilbo.com

_우리 사회에는 남자와 여자가 각각 상대 성(性)을 바라보는 시선에 비대칭이 존재한다. 여자가 보이그룹 좋아하면 ‘빠순이’, 남자가 걸그룹 좋아하면 ‘삼촌팬’이라고 하는 것처럼.

“삼촌팬이라고 부르는 게 문제가 아니라 ‘빠순이’라고 부르는 게 잘못된 거다. 된장녀, 김치녀 등 왜 항상 여자에게만 부정적 프레임을 적용할까. 소위 돈 잘 벌고 잘나가는 남자들, 그래서 단골 술집에 애인을 둔 남자들을 가리켜 ‘김치남’이나 ‘과일안주남’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남자가 힘드니 술 마실 수 있지.’ ‘남자는 돈 좀 있으면 바람 피워도 되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남자가 하면 부정적인 행위도 그럴 만하다고 말하고, 여자에겐 부정적인 면만 부각하려 한다. 이런 사고방식이 암암리에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가부장적 가치체계를 잘 들여다보면 거기에 문제의 뿌리가 있지 않을까.”

_책에 ‘일상화된 차별을 거부하고 불편해하는 감수성 키워야 한다’고 해결 방법을 제시했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사회적 약자는 감수성을 키워서 불편한 소리를 계속 내야 하고, 사회는 그 소리를 듣는 불편함을 견뎌야 한다. 듣는 게 불편하다면 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더 불편하겠나. 내가 최근 책에서 말한 건 주로 차별당하는 사람에게 계속 말해도 괜찮다는 것이었는데, 다음 책은 듣는 사람들에게 좀 불편하더라도 듣자고 쓰려 한다. 차별 받는 사람들은 예민해도 괜찮아야 하고 그런걸 듣는 사람은 불편해도 괜찮고 불편해야만 한다. 그 단계를 넘어야 그걸 제대로 듣고 해결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 탄력이 생긴다. 우리가 좀 더 일찍 약자를 함부로 대하지 말고, 동등하게 대우하는 훈련이 된 사회를 만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에 강남 피해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한편으론 그 사건을 계기로 이런 이야기가 터져 나오게 돼 고마운 마음도 있다. 이런 이야기가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된다. 불편하다는 얘기도 좋으니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과 이야기를 많이 하라고 말하고 싶다. 한 번에 다 바뀔 순 없을 것이다. 조금만 바뀌어도 다음 세대에는 더 큰 변화가 이어질 것이다. 차별에 대한 불평이 불편한 이들에게 당장 공감한다고 말하라고 강요하지 않겠다. 또 생각을 전면적으로 바꾸라고 말하지도 않겠다. 당신이 듣고 있는 이야기가 불편하다면, 당신은 그만큼 사회적으로 불편한 일을 당하지 않고 살고 있었던 거다. 그러니 불편한 이야기를 더 들어야 한다. 들어보고 나서 변하면 되니까 당장은 얘기를 많이 하는 노력이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의 불안은 상상이나 추측이 아니라 실제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시선으로 보라. 그런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영오 여론독자부장 young5@hk.co.kr

정리=고경석기자 kave@hankookilbo.com

이은의 변호사는

-1998년 한국외국어대 포르투갈어과 졸업

-1998년 삼성 입사

-2007년 상사의 성희롱 문제로 회사와 송사를 벌였고 5년여의 소송 끝에 승소.

-2011년 전남대 로스쿨 진학

-2014년 이은의 법률사무소 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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