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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 칼럼] 기업활동이라는 성역

입력
2014.11.1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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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건전화안에 ‘기업활동 위축 안된다’

시행령 개정하고 헌법운운 누리보육 전가

현실외면 절대목표 추구하는 꼼수 버려야

어제 아침 읽었던 신문에서 정부 당국자의 똑같은 발언이 진보라는 신문과 보수라는 신문에, 둘 다 완전히 별개인 사안에 실렸다. 하나는 이명박 정부에서 깎아준 법인세를 다시 올려야 한다는 말에, 또하나는 고액상품권이 뇌물로 악용될 수 있으니 외국처럼 자금세탁방지법을 상품권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말에 했다는 발언이다. 그 말은 ‘기업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어서 안 한다’이다. 기업활동을 위축시킬까봐 법인세도 못 올리고 기업활동을 위축시킬까봐 부정을 막을 방법도 실천하지 않겠다고 한다. 언제부터 대한민국에서 기업활동은 이토록 성역이 되었나.

기업활동이 활발한 게 그렇지 않은 것 보다 좋기야 하다. 고용도 늘어나고 세금도 늘어나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법인세를 올리고 상품권의 유통경로를 투명하게 하는 것이 기업활동을 위축시킨다는 증거가 없다는 데에 있다. 법인세를 깎아준 후에도 투자가 늘지 않았기 때문에 법인세 인하가 기업활동을 활발하게 한다는 증거는 이미 되지 못한다. 상품권의 유통경로를 투명하게 하는 것이 기업활동을 위축시킨다면 서구 선진국들이 이런 장치를 마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의 세금은 기업으로부터 받는 것과 개인으로부터 받는 것이 섞여 있다. 가뜩이나 한국은 기업으로부터 받는 세금 비중이 커서 문제이다. 그래서 정부는 기업활동이 위축되면 세수가 줄까 봐 걱정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식이라면 기업활동을 감싸고 돌수록 더욱 세수 의존도는 커지고 그럴수록 기업을 통제할 방법은 점점 더 없어진다.

기업이 통제를 안 해도 더 많은 고용을 하고 그들이 올린 이윤을 더 많은 사람들과 누리는 거룩한 집단이라면 그래도 될 것이다. 그러나 기업은 태생부터 더 많은 이윤을 올리도록 조직된 집단이다. 다른 비용이 대부분 고정된 상황에서 기업이 이윤을 올리기 위해 가장 쉽게 손대는 것이 임금이다. 4대 그룹 가운데에는 매출이 가장 많은 삼성그룹이 비정규직 비율이 가장 높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전제품 수리기사 같은 개인을 아예 독립법인화한 서비스직까지 포함하면 실질적인 비율은 훨씬 더 높아질 것이다. 비정규직 비율을 늘리고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할 연한이 되면 잘라버리거나 하청에 재하청으로 업무를 내려보내는 일이 기업마다 이윤을 올리기 위해 쉽게 이뤄진다. 이 때문에 개인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점점 더 세금을 내는 비율은 줄어들고 그래서 점점 더 기업의 지분이 커지는 상황에서 기업의 양심만 믿고 있다간 기업의 존재근거이자 국가의 존재근거이기도 한 개개인은 대다수가 쪼들리는 소비층이 되어 나라 경제가 전혀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 닥치게 된다.

기업활동을 위축시켜서 안 된다고 말하려면 기업활동이 활발하면 나라 경제가 잘 돌아간다는 전제가 성립해야 한다. 한국은 올 1월에 블룸버그 통신이 발표한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서는 세계 157개국 가운데 13위를 차지해 작년의 21위에서 8계단이 상승했으며 올 10월의 세계은행 통계에서는 무려 5위를 차지했다. 기업하기 좋은 순위가 상승한만큼 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는가 하면 그건 전혀 아니다.

박근혜 정부 들어 두드러진 정책 방침이 있다면 현실을 보고 정책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일단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정책을 끼워 맞추는 데에 있다. 정부가 무상급식용 재정을 누리보육에 쓰라는 압박을 해서 지방정부와 지방교육청이 싸우게 하는 원인이 된 것이 영유아보육법 시행령에 누리보육 과정을 3~5세로 확대한 것이다. 법도 아니고 정부 마음대로 건드릴 수 있는 시행령만 고치는 편법을 쓰고는 기획재정부 장관이 ‘무상급식의 의무는 헌법에 없다’는 황당한 말을 한다.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기획재정부를 둔다는 것 자체가 헌법에 없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절대 목표는 세웠어도 북한과 가까이 하는 것은 안되고 국가안전은 절대목표이지만 왜 안전이 무너졌나를 드러내주는 세월호 참사 원인 규명은 차근차근 따질 수 없다. 대통령이 틀린 보고를 듣고 4성 장군 옷을 벗기라고 했으면 중도에 잘못된 보고를 알아도 옷을 벗겨야 한다.

현실은 도외시하고 목표만 수행하는 정책이 과연 언제까지 굴러갈 수 있을까.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지 겨우 1년 반이 조금 더 지났을 뿐인데 곳곳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제는 현실을 보고 ‘기업활동을 위축시켜서 안 된다’는 절대목표 역시 접을 때가 됐다.

서화숙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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