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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성 칼럼/1월 28일] 다시 중도를 생각한다

입력
2014.01.2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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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는 허울이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이었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유린되던 시절, 중도는 상처를 입지 않고 근사한 말을 할 수 있는 소도(蘇塗)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 알았다. 비겁을 숨긴 가면임을. 그래서 유신 시절 불쑥 튀어나왔던 중도통합론은 스르르 사멸했다. 시위만 해도 잡혀가 두들겨 맞고, 국회의원이 반공 대신 통일이 국시라고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하던 어두운 시절 중도는 사치였다. 그 때 치열한 언어는 민주주의, 인권, 독재 타도였다. 왜냐? 그 말을 하기 위해선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릴 폭압의 칼날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7080 세대들에게 젊은 시절은 빚이었다. 민주주의를 외치다 잡혀가는 자에겐 오직 자식만을 쳐다보며 희생해온 부모에 대한 죄스러움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이들에겐 세상의 외침을 외면한 데 대한 미안함이 가득했다. 시위도, 공부도 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수많은 젊은이들도 회색인의 자책감에 고통스러워 했다. 물론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놈들"이라고 비난만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회색인이나 완고한 이들이 아닌 치열한 자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이었다.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젊은이의 조작된 주검이 드러났기에, 고문 당하고 집안이 풍비박산 나도 "당신들이 틀렸다"고 외쳤던 이들이 있었기에, 공포와 억압의 세상이 조금씩 무너졌다. 체육관에서 자기들끼리 정하던 대통령을 국민 손으로 뽑고, 정권을 비판해도 마구잡이로 붙잡혀가지는 않는 사회가 됐다. 비록 1987년 개헌 후 첫 직선제 대선에서 민주세력의 분열로 구 세력의 핵심인 노태우 후보가 이겼지만, 민주화 세력의 상징인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도 5년 후, 10년 후 대통령에 올랐다. 심지어 정치의 중심에 서보지 못했던 노무현이라는 변방 정치인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도 했다. 사람들도 가슴에 멍처럼 남아있던 빚을 지우기 시작했다.

빚이 없어져서인가. 노무현 정권 이후 두 번의 대선에서 국민들은 민주화 세력의 후예들을 택하지 않았다. 기업인 출신인 이명박 전 대통령에 나라를 맡겼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을 택했다. 그 사이 정치구도는 '민주 대 반민주'에서'보수 대 진보'로 변했다. YS가 구 세력과 손잡는 3당 합당을 통해 집권했고 DJ가 박정희 세력의 일원이었던 김종필 씨와 DJP 연합을 해서 대통령이 됐으니, 누가 민주고 누가 반민주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로 정치적 혈통 교배가 이루어진 것이다. 더 큰 혼돈은 YS가 민주세력을 떠난 뒤 부산 마산 중심으로 형성했던 민주화 세력의 토대가 약화됐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지역으로 갈린 분열만 남았고, 이를 그럴 듯하게 덧칠한 보수 대 진보 구도가 자리잡게 됐다. 보수가 뭐고, 진보가 뭔지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은 채 오로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틀로 생긴 구도이기에 비난과 저주를 끝없이 재생산해냈다. 그 여파는 정치를 넘어 사회 전반에 확산됐다. 정치와 무관한 영역에서도 피아를 갈라 싸우고 미워하는 사회가 됐다. 사람들의 인식에 유연성이 사라지고 과장이 커졌다. 북한과의 화해를 강조하면 종북 딱지가 붙고, 정권을 비판하면 좌편향이라고 눈을 흘긴다. 반대로 국가기관 대선개입이 드러났다는 사실만으로 마치 3ㆍ15 부정선거가 이루어진 것처럼 단정하고, 노조에 대한 제재가 이루어지면 유신시대로 회귀했다는 반발이 나온다.

이래선 미래가 없다. 51대 49로 갈려 사소한 일에서조차 원수처럼 싸우고 진실과는 거리가 먼 과장과 저주가 횡행해서는 앞으로 갈 수 없다. 싸우는 자들도 갈망한다. 누가 말려달라고. 그 위기감 속에서 중도가 떠오른다. 다만 과거와는 달라야 한다. 어중간한 중도가 아니라 사안마다 진실에 치열하게 접근하는 적확한 중도여야 한다. 가운데 서면 양쪽으로부터 미움 받을 것을 두려워해 한 편에 서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지금 중도는 비겁이 아니라 용기고 치열함이다. 다시 중도를 논해야 할 때가 왔다.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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