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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희 칼럼] 제주 돌담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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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희 칼럼] 제주 돌담을 바라보며

입력
2013.04.1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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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제주도는 봄의 물색이 하도 찬란하여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연분홍 벚꽃이 하늘을 뒤덮다 난분분 떨어지고 나자 이제는 유채꽃이 들녘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눈앞의 빛깔은 때에 따라 수시로 바뀌지만, 그 틈새 곳곳에 저만의 빛깔을 고집하며 묵묵히 웅크려 있는 것도 있으니, 거무튀튀한 돌담이 그렇습니다.

제주도는 흔히 '삼다도'라고 불립니다. 돌 많고 바람 많고 여자 많은 섬이라는 뜻이지요. 그 삼다에서 '돌'을 첫 번째로 꼽을 만큼 제주섬에는 산이든 들이든 바다든, 지상이든 지하든, 돌이 지천으로 널려 있습니다. 또한 제주의 바람은 한번 불기 시작하면 하도 지독해서 '바람이 할퀴고 간다'고 표현할 정도로 모질기 그지없습니다. 게다가 제주의 토양은 화산재가 쌓여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매우 가볍고, 따라서 바람이 한바탕 불어대면 애써 뿌린 씨앗마저 흙먼지와 함께 날아가고 맙니다. 돌담은 이처럼 척박한 환경 속에서 오히려 돌을 이용하고 바람을 다스리며 살아온 지혜의 흔적인 것입니다.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돌담은 그 기능과 쓰임새가 다양했고, 그에 따라 명칭도 다르게 불렸습니다. 초가집 외벽에 쌓은 축담, 집 주위를 에워싼 울담, 마당에서 큰길까지 이어진 골목길 양쪽에 쌓은 올렛담, 밭과 밭의 경계를 짓는 밭담, 산소를 둘러싼 산담….

무심코 바라보면 돌담은 하나의 자연물처럼 보이지만, 실은 인공의 산물입니다. 그것이 오랜 세월 비바람에 시달린 끝에 이제는 원래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있는 것이지요. 게다가 돌담은 주위에 널려 있는 돌을 주워다 쌓은 것이 아니라, 바위투성이 땅속에 묻혀 있는 돌덩이를 하나하나 캐내어 쌓고 포개고 얹어서 담으로 지어놓은 것입니다. 이처럼 억척스러운 노고 끝에 땅은 밭이 되었고, 그 경계에 쌓은 돌담은 방풍막이 되어 흙이나 씨앗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막아주었지요. 그래서 돌담을 '바람 잡는 그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주 돌담에는 '흑룡만리'(黑龍萬里)라는 멋진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시커먼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돌담을 모두 이으면 '만리'에 이른다는 데서 나온 말이지요. 중국의 만리장성에 빗댄 표현인데, 장성처럼 군사적 목적의 시설이 아니라 사람이 환경에 순응하고 자연과 공존하며 살아온 문화적 유산이기에 그 의미가 더욱 각별하고 소중합니다.

돌담을 보면 얼기설기 쌓은 모양이 약간만 힘을 가해도 무너질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어떤 태풍에도 끄떡없습니다. 담을 다 쌓은 뒤 한쪽 끝에서 흔들면 돌담 전체가 흔들리도록 쌓아야 담을 제대로 쌓은 것으로 칩니다.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제각각인 돌들이 그렇게 단단하게 서 있는 것은 담을 이루는 돌들이 서로 어깨를 겯고 함께 버티면서 균형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또, 돌담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습니다. 아니, 돌담은 그렇게 쌓아야 합니다. 돌담은 바람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제 몸뚱이에 나 있는 구멍으로 바람을 들숨날숨처럼 드나들게 합니다. 그렇게 바람과 함께 숨쉬며 소통해야 돌담은 안정과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지요. 중력에 순응한 그 자연의 이치를 돌담의 철학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우리는 흔히 상생이니 무욕이니 하여 인간의 도덕을 떠들어대지만, 정작 그것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은 우리 발끝에 차이는 저 돌멩이들인 것입니다.

앞에서 '봄의 물색' 운운했는데, 그 찬탄이 무색하게도 강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동구 밖에 와 있던 봄처녀가 화들짝 놀라 달아나버렸습니다. 봄이 오기가 그렇게 어렵군요. 세상 이치가 그렇겠지요.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도 돌담이 있기에 안심하고, 돌담 구멍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 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잠들었던 어릴 적 추억이 새삼스럽습니다.

김석희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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