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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희 칼럼] 먹먹해진 가슴을 부여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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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희 칼럼] 먹먹해진 가슴을 부여안고

입력
2013.03.1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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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먹먹하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사전에는 '체한 것같이 가슴이 답답하다'고 풀이되어 있군요. 요즘 제주에는 그렇게 가슴이 먹먹해진 이들이 많습니다. 지난 연말에도 그런 이들을 주위에서 볼 수 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일종의 전염병처럼 증후군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제주 '4·3사건'을 다룬 영화 (감자를 뜻하는 제주 방언)이 그 바이러스를 옮기고 있습니다. 3월 1일 개봉한 이래 영화관 두 곳(그중 하나는 7일 개봉)에서만 상영되었는데도 2주 만에 관객 1만 명을 돌파했고, 계속 순항 중입니다. 가히 문화적 사건이라고 할 만합니다.

더구나 은 영화를 전공하지도 않은(그러나 문화 게릴라 활동을 하면서 내공을 쌓은) 젊은 감독이 불과 2억 원의 제작비로 만든 영화입니다. 그런 영화가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4관왕을 차지하고 올해 세계적인 독립영화제 선댄스영화제 최고상을 받은 것 자체가 대사건이지만, 과연 극장에 걸렸을 때 고향 사람들이 호응해줄까에 대해서는 불안한 염려가 없지 않았지요. 왜냐하면 아직도 제주에서는 4·3사건에 대한 입장이 극명하게 갈려 있고, 이제는 유전인자에까지 새겨진 트라우마는 그 입장의 표명을 암암리에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11월 21일 열린 시사회가 생각납니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간담회 자리에서 한 여고생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4·3이 뭔지도 잘 몰랐다면서 "가슴이 먹먹하다"고 소감을 토로했습니다. 며칠 전에는 열 살 때 4·3을 겪었다는 할아버지가 텔레비전에 나와 영화를 본 소감을 말하면서 "가슴이 먹먹하다"고 한숨을 내쉬더군요. 나도 그랬습니다. 영화를 보고는 가슴이 하도 먹먹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물부터 찾아 마셨습니다.

예상 외로, 어쩌면 간절히 염원했던 대로 관객이 몰려들자 오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더군요. "반가운 일이지만 기분 좋다고는 말 못한다. 동네 할아버지들이 영화를 보러 오신다. 다행히 (4·3사건에서) 살아남은 분들이 보러 오는 건 영화적 즐거움 때문이 아니다. 그분들은 말씀도 없이 가만히 지켜만 보신다. 단순한 영화 관람이 아니라 엄숙한 시간과의 만남이다. 그분들이 극장에 오시는데 관객 많이 든다고 기분이 좋겠나. 마음이 아프고 울컥 하는 심정이다." 그의 겸손한 응시가 또한 아름답습니다.

지금까지 4·3에 대한 접근은, 문학이든 예술이든 일반 담론이든, 그 비극성을 내재화시키는 쪽으로만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픔과 슬픔만 응어리진 상태로 남게 되었고, 또 그것은 절망과 분노로 표출되기 일쑤였지요. 좌니 우니 하는 진영 논리를 앞세우는 바람에 화해와 상생은 말장난으로 끝나고, 둘 사이에는 더 깊은 반목과 갈등의 수렁이 생겨날 뿐이었습니다.

이제 영화 이 그것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영화도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픔과 슬픔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 방식이 예전과는 다릅니다. 아픔과 슬픔이 치유되는 해원의 한마당을 마련함으로써 승화된 감동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영화를 본 사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도 거기에 닿아 있을 것입니다. 체증처럼 가슴에 박혀 있는, 하지만 파내거나 도려낼 수도 없는 상처를 이제는 너와 내가 함께 추체험할 수 있다는 안도감 말입니다. 감히 말하자면 나는 이 4·3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이고 있으며, 이 영화에 구현된 소통 방식은 우리 역사를 관통하는 여러 아픔과 슬픔에도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을 비롯한 육지에서는 이 내일(21일) 개봉된다고 합니다.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관광지로만 알려진 제주에서도 이렇듯 문화적 창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면 제주로 오는 발걸음도 한결 유쾌하지 않을까요? 또한 이 영화를 통해 과거의 상처와 화해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면, 거기에 이 영화의 또다른 의미가 놓일 수 있을 것입니다.

김석희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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