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北 "혈흔만 있었다"
軍 "시신 태웠다"
누가 거짓말 하나

2020.09.25 20:30
북한이 25일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 명의의 통지문에서 공개한 ‘서해 공무원 A씨 피격 사망 사건’의 전말은 전날 우리 군 당국의 발표와 크게 세가지 대목에서 갈린다. 우선 국방부는 A씨가 월북 의사를 밝혔는데도 북한군이 총격을 가했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A씨가 월북 의사를 밝히지 않은 불법 침입자였다고 주장했다. 국방부는 북한이 시신에 기름을 부어 해상에서 불태웠다고 밝혔고, 북한은 A씨가 붙잡고 있던 부유물만 태웠으며, 부유물엔 혈흔만 있었다고 반박했다. 북한의 총격과 시신 처리가 '상부 지시'에 따른 의도적 만행이었다고 국방부는 설명했다. 북한은 대위 혹은 소령급인 정장(바다에 떠 있던 A씨에게 접근한 북한 경비정 지휘관)의 판단이었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주장은 ‘의도치 않은 우발적 사건’이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전날 국방부는 “북한군이 의도적으로 우리 국민에게 총격을 가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22일 오후 3시 30분 북한 수산사업소 선박이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부유물에 타고 있는 A씨를 최초로 발견하고 북한군이 총살하기까지 6시간이나 걸린 점도 이를 뒷받침했다. 6시간 사이에 보고와 지시가 오간 정황을 군당국이 파악한 것으로 알려진다. 월북하겠다는 비무장 민간인을 북한이 '즉결 처분'한 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궁지에 몰릴 터였다. 북한의 설명은 달랐다. 북한은 25일 “22일 저녁, 정체불명의 인원 1명이 우리 측 영해 깊이 불법 침입했다 우리 군인들에 의해 사살(추정)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했다. 22일 '오후'가 아닌 '저녁'으로 A씨 발견 시점을 다르게 주장한 것이다. '사살(추정)'이라고 한 것은 의도성을 부인한 표현이다. 북한은 A씨에게 80m까지 접근해 신분 확인을 요구했으나, 한 두 번 "대한민국 아무개"라고 얼버무리기만 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우리 군인들은 행동 준칙에 따라 40~50m 거리에서 10여 발의 총탄을 불법 침입자를 향해 사격했다”며 부유물에 다시 접근해 보니 A씨는 사라지고 "많은 양의 혈흔"만 확인됐다고 덧붙였다. 시신을 불태웠다는 남한 발표를 부인하고, "국가비상방역 조치에 따라 부유물을 소각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파장을 의식한 북한의 면피성 해명일 가능성이 상당하다. 비무장 민간인 사살은 유엔 인권이사회나 국제사법재판소(ICC)로 전선이 옮겨갈 수 있고, 전쟁 중 민간인 보호를 위한 제네바협약 위반 소지도 다분하다. 반대로 북한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한국 정부가 첩보를 토대로 사건 경위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일부 허점이 발견됐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부 판단은 군과 정보당국,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미국 정보자산 등 복수 채널로 수집한 첩보를 종합 분석한 결과다. 이 중 상당수는 북한 통신신호 감청정보(시긴트ㆍSIGINT)인 것으로 알려졌다. 음성 조각을 모아 암호화된 정보를 풀고, 퍼즐을 맞추는 과정을 수 차례 반복했다는 뜻으로, 정확성이 떨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군 당국은 24일 “22일 오후 10시 11분쯤 감시 장비에 찍힌 불빛이 시신을 태우는 불빛이라는 것은 여러 첩보를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사후에 파악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A씨가 월북 의사를 표명한 사실도 통신 감청으로 파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역시 100%의 정확도를 확신할 순 없다. 군 당국은 A씨의 월북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구명조끼 착용 △어업지도선에서 내릴 때 신발을 두고 간 점 △부유물을 이용한 점 등을 들었지만, 전부 정황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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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피격에 재조명되는 '금강산 박왕자 사건'

2020.09.25 19:58
실종 공무원 피격 사망 사건이 큰 파장을 일으킨 가운데 2008년 고(故) 박왕자씨 사건이 재조명되고 있다. 이번처럼 당시 북한군이 무방비 상태에 있던 남측 민간인을 향해 총을 발사했기 때문이다. 박씨 사건은 금강산 관광을 간 박씨가 2008년 7월 11일 오전 5시쯤 해안가를 산책하다가 북한군 해안초소에서 발사된 총탄에 맞아 숨진 사건이다. 우측 등에서 가슴을 관통하는 부분과 왼쪽 엉덩이 부근에 각각 한 발씩, 두 발의 총상을 입었다. 북한은 당시 박씨가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구역에 들어왔다가 북한군 경계 지역에 진입, 초병의 정지 요구에 불응하고 도주하는 과정에서 발포했다고 밝혔다. 북측은 같은날 오후 1시 박씨의 시신을 한국에 인계했고, 통일부는 오후 4시 피살 사실을 공개했다. 박씨의 남편인 방모씨는 당시 박씨의 시신을 인계받으면서 "아내가 키가 작은데 (군통제선에 있던 철조망을 넘어갔다는 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며 사망 경위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명박 정부는 당시 '관계부처합동대책반'을 구성해 진상 조사에 나섰다. 그러면서 금강산 관광을 잠정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금강산 관광의 길은 막혀 지금까지 재개되지 않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사건 발생 이튿날인 12일에 열린 긴급장관회의에서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한 시간대에 저항 능력도 없는 민간인 관광객에게 총격을 가해 소중한 생명이 희생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북측을 강하게 규탄했다. 그러면서 "정부 위기 대응시스템에 중대한 문제가 있음이 확인됐으니, 개선 방안과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이 대통령의 발언 이후 이날 오후 7시 북한은 사건 발생 38시간 만에 유감을 표명했다. 다만 '우발적 사고'였다는 점을 강조하며 책임을 남측에 돌렸다. 명승지종합개발지도국 대변인 명의의 담화를 통해 "남조선 관광객이 우리 군인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며 "이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사망 사고는 유감이지만, 책임은 전적으로 남측에 있다"며 "남측은 우리 측에 명백히 사과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세워야 한다"며 자신들은 책임을 질 일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어 "남측의 진상조사는 불허하며 대책을 세울 때까지 금강산 관광객은 받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공동조사 등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관광객 신변 안전 보장 △재발 방지 등 정부의 '3대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다만 당시 금강산 관광 사업을 운영했던 현대아산이 북측에 머물며 자체 조사를 벌이는 등 나름의 현장 조사가 가능했다. 윤만준 현대아산 사장은 12일 피격 사고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방북해 진상조사를 벌였다. 당시 금강산에 머물고 있던 1,300여명의 관광객은 일정을 앞당겨 13일까지 모두 돌아왔다. 당시 박씨의 사망 지점을 두고 남측과 북측의 주장이 엇갈리면서 큰 쟁점이 됐다. 일각에선 북측이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려 한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합동조사단은 25일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현대아산이 시신 수습 때 찍은 사진과 사망 현장이 포함된 관광객의 당시 사진 등을 정밀 감정한 결과 박씨가 해수욕장 경계에서 군통제 구역으로 200m 들어간 지점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반면 북측은 현대아산 측에 사건 발생 당일 해수욕장 경계선 울타리에서 200m 떨어진 곳에서 박씨가 사망했다고 했지만, 윤만준 현대아산 사장이 방북했을 때 300m 떨어진 지점이라고 100m를 수정했다. 이를 두고 북한이 말 바꾸기를 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박씨 사망 시간도 북측은 11일 오전 4시55분에서 5시 사이라고 했지만, 합조단은 오전 5시16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파악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북 관계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남북 사이의 사건 원인 등을 두고 공방이 이어지자 정부는 같은달 18일 금감상ㆍ개성공단 사업 관계부처 합동 점검 평가단을 꾸려 남북교류 사업 자체를 다시 검토 했다. 정부는 22일과 24일에 열린 '아세안+3' 외교장관회의와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박씨 사건을 제기하며 북측에 합동진상조사단 수용을 촉구했다. 그러나 북한은 정부의 거듭된 합동 조사 요구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박찬호, 서재응 이후…
류현진, 김광현
나란히 동반 승리

2020.09.25 16:28
류현진(33ㆍ토론토)과 김광현(32ㆍ세인트루이스)이 박찬호ㆍ서재응 이후 15년 만에 '코리안 리거' 동반 승리를 따냈다. 류현진과 김광현은 25일(한국시간) 나란히 뉴욕 양키스, 밀워키전에 선발 등판해 동반 승리를 챙겼다. 먼저 승전보를 올린 건 류현진이다. 류현진은 양키스와 홈 경기에서 7이닝 5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아 토론토의 4-1 승리를 이끌었다. 이어 밀워키와 홈 경기 마운드에 오른 김광현은 5이닝 5피안타 1실점 호투를 펼쳐 세인트루이스의 4-2 승리에 발판을 놨다. 류현진과 김광현은 이날 전까지 세 번이나 같은 날 등판했지만 승리가 엇갈렸다. 하지만 네 번째 도전인 이날 정규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각각 5승, 3승째를 수확하며 2020시즌을 ‘해피 엔딩’으로 장식했다. 한국인 빅리거가 같은 날 승수를 챙긴 건 2005년 8월25일 이후 처음이다. 15년 전 샌디에이고에서 뛰었던 ‘코리안 특급’ 박찬호는 휴스턴전에서 5이닝 5피안타 2실점(1자책)으로 승리를 따냈고, 뉴욕 메츠 소속이었던 서재응은 애리조나전에서 7이닝 7피안타 2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됐다. 토론토 이적 첫해 마지막 등판에서 류현진은 최고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그 동안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천적’ 양키스를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면서 토론토의 포스트시즌 진출까지 확정시켰다. 토론토가 ‘가을 야구’를 하는 건 2016년 이후 4년 만이다. 무엇보다 류현진은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에이스다운 역투를 펼쳤다. 이날 올 시즌 처음으로 7이닝 이상 소화했고, 최다 투구 수 100개를 찍었다. 올해 토론토 선발 투수가 7이닝을 버틴 건 류현진이 처음이며, 팀 내 마지막 기록은 2019년 8월23일 제이콥 와그스첵이었다. 또 시즌 평균자책점은 3.00에서 2.69까지 끌어내리며 3시즌 연속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올해 평균자책점 순위는 아메리칸리그 4위다. 류현진은 경기 후 “나는 이기기 위해 토론토에 왔다”며 “등판한 경기에서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해 평소보다 기쁨이 두 배였다”고 소감을 밝혔다. 현지 취재진도 일제히 찬사를 보냈다. MLB닷컴의 키건 매티슨 기자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류현진이 평균자책점을 2.69로 낮췄다”며 “2020시즌 토론토의 최우수선수(MVP)”라고 평가했다. 데일리 하이브의 이언 헌터 기자도 “류현진이 올 시즌 12차례 선발 등판에서 7차례 퀄리티 스타트(6이닝 3자책점 이하)를 기록했는데, 류현진을 뺀 나머지 투수들이 기록한 퀄리티 스타트는 단 4차례”라며 에이스의 독보적인 성과를 조명했다. 올해 메이저리거 꿈을 이룬 김광현도 데뷔 첫해부터 안정감을 뽐내며 포스트시즌 3선발 자리를 사실상 예약했다. 시즌 개막 때만 해도 선발 경쟁에서 밀려 마무리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팀 내 코로나19 집단 감염 사태로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했고, 그 이후 팀 에이스 애덤 웨인라이트 못지 않은 안정감을 뽐냈다. 선발로 24.1이닝 연속 비자책 행진을 벌였던 김광현의 선발 투수 성적은 3승 무패 평균자책점 1.42다. 시즌 마지막 등판에서도 포스트시즌 경쟁 팀인 밀워키를 상대로 빠른 공과 슬라이더, 체인지업까지 구사하며 5이닝 5피안타 1실점으로 막았다. 이날 경기 전까지 1.59였던 평균자책점은 1.62로 소폭 상승했지만, 시즌 평균자책점은 여전히 30이닝 이상 던진 투수 중 가장 낮다. KBO리그에 이어 빅리그에서도 활약을 이어가고 있는 김광현은 공을 안방 마님들에게 돌렸다. 그는 “한국에서 첫해부터 박경완이라는 대포수를 만났고, 여기서는 야디에르 몰리나라는 포수를 만나서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며 “몰리나는 웨인라이트와 함께 내가 메이저리그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 선배”라고 고마워했다.

마구잡이 진도에 답 없는 채팅창 "이게 교육인가요?"

“딸이 실시간 쌍방향 수업을 한다고 해서 좋아했죠. 그런데 시험 직전 갑자기 출제 범위까지 진도를 확 빼버리더군요. 채팅방에서 애들이 ‘모르겠어요’ 하는데도 교사가 ‘어쩔 수 없다’라며 수업을 그냥 진행했어요.” 경기 성남시에서 중학생, 초등생 자녀를 키우는 강경인(가명)씨는 지난 4월 이후 목격해온 원격수업에 대해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그걸 어떻게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강씨는 1년에 학비만 1,000만원가량 드는 사립초·특목고와 무상교육을 받는 일반학교의 차이가 이런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자괴감마저 느꼈다고 했다. 원격수업에 대한 불만은 고등학교라고 다르지 않았다. 서울 강서구 한 사립고교 1학년 학생인 오창석(가명)군은 “EBS 영상 시청하고 출석 댓글난에 출석체크만 했다”고 말했다. 오군도 강씨처럼 교실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 장기화로 교실은 불신과 불만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4월부터 잠시 동안의 등교 수업을 제외하면 사실상 대부분의 공교육이 온라인으로 진행되면서 학부모와 교사는 물론, 학생과 교사의 소통부재가 콘크리트처럼 굳어졌고 학생관리의 짐을 대부분 학부모들이 떠맡았다. 학생은 교사의 진도 방향을 이해할 수 없다 했고, 부모는 비싼 사교육보다 질이 떨어지는 공교육에 믿음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 교사들은 이러한 학부모와 학생의 불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코로나19로 반년여 동안 지속된 온라인 수업은 공교육의 혁신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동시에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두꺼운 불신의 벽을 세워놨다. 서울에서 공립초 1학년생 자녀를 키우는 학부모 김인수(가명)씨는 “지금까지 열 번도 채 등교를 못했다”면서 “수업 안내는 ‘e알리미’로 받아 요일별 시간표대로 학부모가 수업을 진행하고 EBS 수업을 시청하는 게 전부”라고 말했다. 맞벌이를 하는 김씨 부부는 퇴근 후에야 4,5교시에 달하는 하루 치 수업을 아이와 함께 한다. 교과수업뿐 아니라 ‘가족역할극 하기’ ‘유튜브 시청하고 만들기’ 같은 과제까지 내줘 온 식구가 밤늦도록 숙제에 매달린다. 교육과정 이수에 대한 압박을 고스란히 감내하는 셈이다. 이들 부부에게 학교와 교사는 불신의 대상이 됐다. 부산의 공립고에 다니는 3학년 배윤서(가명)양은 “오히려 (컴퓨터 등) 기기를 못 다루는 선생님들이 (콘텐츠를 만들 필요 없는)실시간 쌍방향 수업을 하고, 그렇지 않은 선생님들은 콘텐츠를 만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교사에 따라 수업 질의 편차가 심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학생ㆍ학부모의 ‘심증’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경기도교육연구원이 7월 15일부터 27일까지 경기도 내 학생ㆍ학부모ㆍ교사 5만5,966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을 실시한 결과 ‘선생님(과목)에 따라 온라인 수업 내용에 차이를 크게 느낀다’는 학생 응답이 57.5%에 달했다. 교사와의 소통 부족도 불만거리다. 배양은 온라인 수업 기간 동안 교사에게 질문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실시간 쌍방향 수업때 질문을 해도 선생님이 채팅창을 확인하지 않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진로 상담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배양은 “올해 진로 상담은 전화, 대면 딱 두 번 뿐”이라며 “대입전형이 계속 바뀌는데, 혼자 찾아보고 수시 넣을 대학도 혼자 결정했다”고 말했다. 초1 학부모 김씨도 “담임교사 상담은 전화 두 번이 전부였다”라며 "수업을 진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어도 교사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했다"고 답답해했다. 경기도교육연구원의 설문조사에서 학부모에게 온라인학습에 대한 교사와의 대화 증가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전체의 84.5%가 ‘그렇지 않다’고 응답했다. 초등학교 학부모의 부정응답 비율(87.3%)이 가장 높았고, 중학교 83.7% 고등학교가 81.1% 순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립학교의 ‘실시간 쌍방향’ 수업을 보면 박탈감은 더 심해진다. 첫째는 자사고, 둘째는 공립중학교에 보내는 학부모 한미경(가명)씨는 공립과 사립의 차이를 절감한다. 한씨는 “첫째는 처음부터 실시간 쌍방향 수업을 한 반면 둘째는 구글 클래스에 올라오는 콘텐츠를 보는 식”이라며 “상위권 학생이 많은 자사고는 아이들이 공부하는 자세도 잡혀 있어 오히려 온라인수업을 등교수업보다 선호했고 진로 결정도 교사의 상담이 절실하지 않는 등 큰 문제는 없었는데 공립학교의 경우 그런 관리가 되지 않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교사들도 할 말이 많다. 학부모들의 불신을 불러온 공교육 온라인 수업의 한계는 교사들의 자질이나 노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는 목소리가 높다. 경기 한 공립초 2학년 담임인 이정현(가명) 교사는 “공립초와 사립초, 일반고와 특목고 원격수업 수준을 비교하는 시각이 있는데 우리도 사립초 특목고 교사들이 부럽다. 실시간 쌍방향 수업을 하면 듀얼(이중) 모니터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 학교는 전교 통틀어 한 대”라고 말했다. “솔직히 온라인수업에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게 아니라서 이제 연차 높은 선생님들도 줌(Zoom)으로 수업하고, 영상 콘텐츠도 찍으세요. 한데 공립학교 중에 기기는커녕 와이파이가 안 되는 곳도 있습니다.” 경기도교육연구원 설문에서 학기초와 비교해 ‘온라인수업 역량이 늘었다’고 응답한 교사가 84%에 달했고, 같은 조사에서 교사 74.7%는 온라인 수업 중 학생 질문에 즉각 피드백을 한다고 답했다. 상당수 교사가 온라인수업에 자신감이 붙고 열정도 있지만 ‘예산’이 따라주지 않아 한계가 있다고 인식하는 셈이다. 교실 수업에서 온·오프라인 교재를 함께 쓰는 수업을 10년간 해온 서울 계성초 조기성 교사 역시 “(사립인 계성초가) 3월부터 쌍방향수업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프라와 경험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예체능과목은 해당 전공교사가 영상물을 제작해 상영하고 과제를 내주면 담임이 학생들의 과제 하는 모습을 쌍방향으로 지켜봤다고 말했다. 학부모들이 ‘사립초는 다르다’며 감탄하는 부분이지만 그는 “학부모가 맞벌이라 해도 대부분 재택근무가 가능한 분들”이라며 “사각지대로 불리는 저소득층 가정에서 당장 실시간 쌍방향수업을 실시하기 더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사각지대’가 많은 지역의 학교일수록 교사가 ‘수업품질’외 신경써야 할 부분이 늘어난다. 이정현 교사는 “지난주 주 1회 쌍방향수업을 실시하라는 공문이 내려와 학부모들께 안내했더니, 일부 학부모가 맞벌이라 불가능하다고 답해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수업 외 상황’을 걱정하는 건 중등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인천 한 공립고 손혜영(가명)교사는 “과제 내라고 연락했다고 학생한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차단당한 교사가 여럿인데 이런 경우 대개 학부모도 통화를 거부한다”고 토로했다. 올 초 일부 특목고가 실시간 쌍방향수업으로 ‘진도 빼기’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수험생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우려와 부러움이 쏟아졌고 ‘실시간 쌍방향=질 높은 원격수업’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쌍방향 수업이 부족한 공립학교 부모들의 교사들에 갖는 불만이 시작된 지점이다. 그러나 정작 상당수 특목고는 교육부가 ‘쌍방향수업을 늘리겠다’고 발표한 지난주부터 쌍방향수업 비중을 줄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남 유명 자사고 3학년 담임인 김휘민(가명) 교사는 “특목고 교사들이 쌍방향 수업을 한 건 진도보다 학생부 때문”이라며 “온라인수업 중 유일하게 쌍방향수업은 수행평가로 학생부기록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수시 합격생 비율이 일반고보다 높은 자사고, 특목고가 쌍방향수업을 많이 한 것일 뿐 다른 이유가 없다는 설명이다. “그 시간에 컴퓨터 앞에 붙어 있어야 되냐”며 쌍방향수업 줄여달라는 학부모 민원으로 이 학교는 수업 중 상당부분을 일방향 콘텐츠로 바꿨다. 김 교사는 “특목고가 이미 줄이고 있는 쌍방향수업을 늘리겠다는 정책을 온라인개학 7개월만에 내놓고, 발표 일주일만에 시행하라는 교육부가 답답하다”고 말했다. 인천 한 특목고 교사 김정주(가명)씨는 “특목고도 지역마다 편차가 있다”고 말했다. 원격수업이 시작된 지난 4월 9일부터 실시간 쌍방향수업을 시작한 김 교사는 “특목고라도 일부 노후 학교는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아 일방향 콘텐츠를 주로 사용한다. 인천의 경우 학부모들이 학교에서 빡빡하게 수업하는 걸 바라지만, 강남 특목고 학부모들은 학원수업을 선호해 쌍방향을 하지 말라는 민원이 많다”고 말했다. 교사들은 매 교과시간 ‘실시간 쌍방향 수업’을 하는 건 불가능할뿐더러 효율도 낮다고 말한다. 올초 교육부 온라인개학 발표 전부터 학습사이트 ‘학교가자닷컴’을 제작하는 등 온라인 교육 분야에서 이름을 알린 대구 진월초 신민철 교사는 “실시간 쌍방향수업은 전체 수업의 절반”이라며 “출석 시간 내내 쌍방향수업을 하는 건 아이들에게 고문”이라고 단언했다. 실제 국내 사이버대학의 1학점 수업시간 역시 일반 대학의 절반인 25분이다. 온라인수업의 피로도가 높아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적기 때문이다. 공립학교의 온라인수업이 부실하다고 불신하는 학부모의 시각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이 지난 7월 29일부터 8월 1일까지 교사 5만1,021명으로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 40.9%가 △일방향 △실시간 쌍방향 △과제 중 2가지 이상 형식을 섞은 ‘혼합형’수업을 한다고 응답한 건 이런 배경에서다. 신 교사는 “원격교육 실패 사례를 연구할 때”라고 지적했다. “교육당국도 언론도 자주 원격교육 성공 사례를 일반 학교와 비교하는데, ‘생존자 편향의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살아 돌아온 전투기의 총알 맞은 부분이 아니라 돌아오지 못한 전투기가 총알 맞았을 부분을 보완해야 하는 것처럼 실패 사례를 발굴해 그 교사와 학부모들을 독려하고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권순일 "보수의 '배신자' 프레임이 '지각 사퇴' 오해 불렀다"

“선관위원장 임기 논란은 결국 4ㆍ15 부정선거 주장에 선을 긋고 이재명 경기지사까지 무죄로 풀어준 보수의 배신자가 연임 운동까지 한다는 황당한 프레임에서 시작한 것이다.” 지난 22일 사직서를 제출한 권순일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23일 서울 서초구 개인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이른바 ‘지각 사퇴’ 논란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대법관 임기가 끝나면 겸임하던 선관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관행을 따르지 않고 위원장 직무를 계속 한 것은 공석이 된 선관위 사무총장과 사무차장 인사 때문이지 연임 의도는 없었다는 것이다. 권 위원장은 “8월쯤 선관위 사무총장과 사무차장이 2년이 다 되어 관례대로 사임한다면서 후임자 인선까지는 남아달라고 건의를 해왔다”며 “이후 9월 3일 총장과 차장이 사표를 낸 상황에서 선관위원장까지 사표를 내는 건 무책임하다고 봤다”고 말했다. 실제로 권 위원장은 21일 선관위 전체회의에서 김세환 사무차장이 사무총장에, 후임 사무차장에 박찬진 선거정책실장이 선임되자 이튿날인 22일 위원회에 곧바로 사표를 제출했다. 권 위원장은 “사무총장은 역대로 사무차장이 승진하는 게 관례이고, 차장은 2~3명의 내부 인사 중에서 뽑는다”면서 자신이 청와대ㆍ여당과 교감 하에 특정 인사를 선관위 고위직에 발탁하려고 했다는 일각의 의혹도 일축했다. 독립성과 중립성이 생명인 선관위 사령탑으로 코로나19 확산 위기에도 4ㆍ15 총선을 무난히 치러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권 위원장은 지난해 패스트트랙으로 통과된 선거법으로 선거를 치르면서 보수ㆍ진보 양쪽에서 모두 공격을 받았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국민의힘 한 다선 의원으로부터 ‘보수의 배신자ㆍ변절자’라는 문자도 받았고, 한 선관위원이 회의석상에서 이재명 무죄 판결을 문제 삼아 연임 운동 의혹을 제기하는 수모도 겪었다고 소개했다. 2012~2014년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서 법원행정처 차장을 지낸 권 위원장은 이날 사법농단 사태와 관련 자신에게 제기된 의혹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사법행정과 관련해서는 당당하다”고 말했다. 권 위원장은 김명수 대법원장이 대법관 중에서 대법원 몫의 후임 선관위원을 지명해 새로 선관위원장이 뽑힐 때까지 헌법상 선관위원장 지위를 유지하게 된다. 다음은 일문일답. -사무실 이름이 ‘지지재(止止齋)’다. 무슨 의미인가. “멈추고 또 멈추는 학당이다. 노자에 나오는 ‘지족불욕(知足不辱) 지지불태(知止不殆)’, 즉 스스로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분에 맞게 머물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의미다. 공직이나 업무를 멈추고 본래의 자신을 찾아 소홀했던 것을 되찾자는 의미다.” -그런데 9월 7일 대법관 퇴임 후에도 선관위원장직을 계속 유지해 논란이 됐다. “8월쯤 선관위 사무총장과 사무차장이 2년이 다 되어 관례대로 사임한다면서 후임자 인선까지는 남아달라고 건의를 해왔다. 이후 내가 대법관 퇴임하기 전인 9월 3일 총장과 차장이 사표를 냈다. 그런 상황에서 선관위원장까지 사표를 내는 건 무책임하다고 봤다. 선관위의 울타리가 되어 정치적 외압을 감시하고 막는 게 내 임무다. 그런 헌법적 책무를 대법관 그만뒀으니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일부에선 위원장으로 남아 내년 서울ㆍ부산시장 보궐선거와 차기 대선 때 문재인 정부 편을 들어줄 선관위 고위직을 뽑는 게 아니냐는 의심도 제기됐다. “보수 쪽에서 내가 청와대ㆍ여당과 교감 하에 특정 인사를 선관위 고위직에 발탁한다는 식으로 스토리 라인을 그렸던 것 같다. 하지만 완전 소설이다. 청와대와 여당은 그런 부탁을 한번도 해온 적이 없다. 사무총장은 역대로 사무차장이 승진하는 게 관례이고, 사무차장도 2~3명의 내부 인사 중에서 뽑는다. 오히려 일부 선관위 고위직 OB(전직)들이 개인적 친분과 이해관계에 따라 누군가를 차장으로 밀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얘기는 들었다.” -사법연수원 14기 동기인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임기 문제로 통화를 했다는 얘기는 뭔가. “주 원내대표가 나한테 전화를 한 것은 맞다. 그런데 통화 내용은 공석인 선관위원 두 자리 인선 관련이었다. 나는 법조인 말고 정치학자, 언론학자, 미디어전문가가 오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면서 주 원내대표가 7일 대법관을 그만둔다고 하는데 선관위원장도 물러나는 것이냐고 묻기에 (사무총장ㆍ차장 인선 때문에) ‘꼭 그렇지는 않다’고 했는데, 마치 내가 임기 문제를 상의한 걸로 언론에 보도가 됐다.” -왜 이렇게 선관위원장직 유지를 놓고 공격을 한다고 보나. “극우 진영에선 부정선거 주장에 선을 그으니까 앙금이 있는 듯하고, 일부 합리적 보수도 총선 전 ‘비례한국당’ 당명을 사용 못하게 했다는 섭섭함이 남아 있는 것 같다. 한번은 국민의힘 한 다선 의원이 보낸 문자가 나한테도 왔는데, 권순일은 ‘보수의 배신자’, ‘보수의 변절자’라는 내용이었다. 연임 내지 다른 직을 가지려고 딴마음을 품었으니 관련 유튜브 방송과 문건을 널리 확산ㆍ공유하자는 것이다. 또 8월 선관위 전체회의에선 한 선관위원이 '위원장, 연임 운동을 했습니까'라고 묻더니 써가지고 온 문건을 읽더라. 이재명 경기지사 불공정 재판을 해놓고 선관위원장을 계속해도 되느냐는 힐난이었다. 심지어 서기에게 써온 문건을 건네면서 한 자도 빼놓지 말고 회의록에 올리라고 하더라. 하도 황당해서 항의를 할까 하다가 같은 동료 선관위원과 논쟁을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참았다.” -이재명 지사 상고심 재판에서 무죄 의견을 내기는 했다.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고 허위사실 공표에서 공표의 자유를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엄격하게 해석하는 것은 옳은 방향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토론은 질의 응답이 반복돼 공표가 아니다. 상대가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그 즉시 재질의 또는 추궁할 수 있다. 유권자가 판단하도록 해야지, 검사가 토론회 녹취록을 가지고 기소하는 건 과잉사법이다.” -항간에는 권순일 대법관이 돌아서면서 이재명 상고심 전원합의체 판결이 7대 5로 바뀌었다고 알려졌다. “12명 대법관(김선수 제외) 중 5대 5로 갈린 상황에서 선임대법관인 내가 무죄로 가면서 6대 5로 균형이 깨지고, 김명수 대법원장이 가세하면서 7 대 5가 됐다는 것인데 잘못된 보도다. 사실 처음부터 나는 유ㆍ무죄 어느 쪽도 아닌 소수의견을 준비했다. 나는 진실 논쟁은 하급심에 맡기고 법리만으로 끝내자는 입장이었다. 선관위원장까지 지냈으니 선거운동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토론회 녹취록을 갖고 고소하는 사태는 막아야 한다는 법률의견만 남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준비한 소수의견에 다수의견이 따라 붙었다. 무죄라는 결론만 제외하면 사실상 내 의견이었다. 그래서 다수의견에 조인한 것이다.” -선관위원장을 지내면서 진보ㆍ보수로부터 모두 공격을 받았다. “지난해 연말에 개정 선거법이 만장일치가 아닌 방식으로 급격하게 통과되면서 선관위가 많은 결정을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선관위에 대해서 언론이나 정치권으로부터 많은 도전이 있었다. 보수단체에선 4ㆍ15 총선이 부정선거라며 시위를 하고, 선거소송도 이례적으로 많았다. 의혹 제기가 난무해서 그대로 방치하면 선거의 정당성은 물론이고 선관위의 존폐 여부까지 의문시되는 상황이었다.” -선관위가 비례 위성정당 출현을 막지 못해 준연동형비례대표제 취지가 훼손됐다고 비판도 많았다. “선관위는 법집행기관이다. 국회처럼 정무적 판단을 하지 않는다. 정당법상 정당 등록 요건만 갖추면 허용해주도록 정당법에 규정돼 있다. 위성정당이라고 안 해줄 수 없다. 등록 신청한 내용과 달리 실질적 내용에 허위가 있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정당 요건을 갖추지 못한 정당은 정당등록 무효 사안이고, 이건 헌법재판소가 판단하게 돼 있다.” -대법관 퇴임식도 안 하고 법원을 떠나 퇴임사도 남아 있지 않다. “코로나를 의식해 퇴임식을 안 한 측면도 있지만, 말 많은 나라에서 말을 조금 적게 하자는 생각도 있었다. 대신 2020년에 쓴 판결문 이유들은 다 퇴임사를 의식하고 쓴 글이다. 가령 조영남 사기 사건 판결은 사법 자제와 검찰권 행사에 관한 글이다. 고소도 없는데 검사가 재산 범죄에 개입해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미술품의 가치를 평가하고 당신은 사기 당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조영남 사건의 사법 자제 법리는 이재명 사건 법리와 같은 맥락이다.” -2018년 대학 교수의 성희롱 사건을 판결하면서 성인지 감수성 개념을 처음 담았다. “피해 여성 증언의 신빙성 여부는 평균인의 입장에서 판단해야 한다. 재판하는 50대 남자가 ‘이렇게 행동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보는 건 자신을 평균인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증언하는 피해자 입장과,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평균이 무엇인지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가령 20대 여성에게는 교수에게 잘 보여야 추천서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있고, 피해를 당했다고 나섰다가 모난 정이 돌 맞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있을 수 있다. 그런 것을 보는 능력이 성인지 감수성이다.” -아동의 ‘출생 등록될 권리’도 제시했다.(※난민 신분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출생 등록이 거부된 사건에서 아버지의 혼외자로라도 출생신고를 받아줘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 “하급심 논리대로라면 현행법으로는 출생 등록을 안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임이 명백한 상황에서 출생조차 인정하지 않겠다는 게 사법체계로서 온당한 처사인가. 인간의 기본적 권리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법률 적용이나 해석이 어려운 부분은, 헌법적 관점에서 해석론을 펴야 한다는 게 출생 등록 권리 판결이 나온 배경이다.” -퇴임하면서 판결 100선을 모아 펴낸 책 제목이 ‘공화국과 법치주의’다. “법치행정을 하면 ‘법치주의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하게 되는데 공화국이라는 개념을 통해 법치주의를 이해하게 되었다. 공화국이 한 개인의 뜻에 의해 좌우되는 독재 또는 전제정이 아니라면,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나 정부도 법에 의한 지배를 받아야 한다. 또 권력은 분립되어야 하고 법의 지배를 통해 시민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다는 믿음에 크게 감동받았다.” -우리 사회 대법관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국회에서 만든 성문법이 공표되면 이미 과거의 일이다. 구체적 현실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는 법관이 발견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살아있는 법'을 최종적으로 선언하는 것이 대법관의 책무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일했지만 사법농단 의혹 관련 공개적인 입장을 밝힌 적은 없다.(※권 위원장은 2012년 8월부터 2014년 6월까지 행정처 차장을 지냈다) 먼저 강제징용 대법원 재판 지연을 청와대와 협의했다는 의혹이 있었는데. “2013년 9월 6일 홍경식 민정수석을 청와대에서 만나긴 했지만 강제징용 관련 협의가 아니었다. 그 무렵 대법원과 법무부, 유관기관이 준비하던 한미특허 국제컨퍼런스 관련 자료를 전달해준 게 전부다. 같이 갔던 행정처 심의관을 먼저 조사했기 때문에 검찰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검찰이 나를 타깃 삼아서 마치 강제징용 협의차 청와대에 간 것처럼 발표를 했다. 이걸로 정의당이 저를 탄핵소추했는데, 소추문을 보니 8월 말에 강제징용 사건이 재상고됐고 9월에 제가 청와대에 갔으니 연관성이 의심된다는 게 전부다.” -법관 인사 불이익 문건 관련 공범으로 적시됐다. 당시 차한성 행정처장과 임종헌 기획조정실장 중간에 있었는데. “나도 공소장을 찾아봤다. 처음에는 ‘공모하여’라고 돼 있으나 본문에는 구체적 혐의 내용이 없다. 2013년과 2014년 한번씩 인사철에 인사심의관과 윤리감사관으로부터 인사 관련 보고를 들은 게 전부다. 당시 법원행정처장이든 대법원장이든 인사 불이익 얘기를 상의한 적도 없고, 내가 인사 불이익을 주라고 지시한 적도 없다. 원세훈 국가정보원장 무죄 판결을 '지록위마'라고 비판한 김동진 부장판사 관련 보고를 얼핏 듣긴 했는데 그나마도 오해의 소지가 있어 이번에는 인사를 내지 않는다고 했던 게 기억난다. 2018년 그 사건이 터지고 나서 1년 6개월 동안 언론에서 매일 지탄을 받았지만, 문제가 안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왜냐하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으니까. 인사 자료 모아온 거에 서명했다고 피해 본 사람이 있겠나. 사법행정과 관련해서는 당당하다. 조금이라도 문제 있으면 검찰이 가만 안 뒀을 것이다." -사법농단 사건은 어떻게 평가하나. “내가 행정처를 나온 뒤에 벌어진 일은 언론을 통해서만 봤기 때문에 의견을 내는 게 조심스럽다. 하지만 부적절하거나 위법한 사태가 있으면 당연히 시정하고 책임질 일은 책임져야 한다. 다만 정치적ㆍ도의적 책임, 행정적ㆍ형사적 책임이 있는데 옥석구분 없이 검찰이 법원장과 판사들을 모조리 기소했다. 그건 법정에서 가려야 한다.” -진보 우위의 대법원의 편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입장을 먼저 정해놓고 사건을 바라보면 대법관이 아니다. 그러면 공화국과 법치주의는 무너진다. 이재명 판결이나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사건 판결 모두 보수ㆍ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법외노조 통보 처분은 법률이 아닌 시행령으로 한 것이다. 보수가 전교조의 의식화 교육을 우려하지만, 법외노조 처분한다고 해서 몇 만명에 달하는 전교조라는 실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너네랑은 애기 안 해’는, 보수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이제는 노조 문제도 ILO 같은 국제적 기준에 맞춰가는 시대다.” -향후 거취는. “로스쿨 몇 군데에서 제안이 왔는데, 지금은 조용히 책 읽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 원래는 판검사 대신 학문의 길을 가려고 했다. 오랜 세월 현업에 있다가 이제야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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