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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어떤 낙태인가?

입력
2017.11.09 20: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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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회원들이 9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에서 낙태죄 폐지 결의 범시민사회단체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낙태죄 폐지는 여성의 몸을 인구통제의 도구로 삼아온 역사를 마감해야 한다는 선언이자, 생명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기 위한 오랜 고민의 결과"라고 밝혔다. 뉴스1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회원들이 9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에서 낙태죄 폐지 결의 범시민사회단체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낙태죄 폐지는 여성의 몸을 인구통제의 도구로 삼아온 역사를 마감해야 한다는 선언이자, 생명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기 위한 오랜 고민의 결과"라고 밝혔다. 뉴스1

일본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가 1996년 별세하기 전 비평가 가토 슈이치와 번역을 주제로 나눈 대담에서다. “대학분쟁 때 전공투 학생이 찾아와 ‘학생은…’이라고 말하길래 “자네가 말하는 학생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건가?” 하고 물었습니다. 야스다 강당에서 농성 중인 사람들인가, 다른 학부에서 농성하고 있는 반대파인가, 아니면 불참한 정치적 무관심층을 말하는가 하고 말이죠. 좀 심술궂은 도발이긴 했지만, 일반적으로 그런 겁니다.” ‘모두의’ ‘약간의’ ‘하나의’ ‘어떤 하나의’ 같은 관사를 통해 발화 중 끊임없이 세밀한 분류를 수행하는 영어 사용자들과 달리, 관사가 없는 일본어의 특성상 “일본인들은 그저 ‘사무라이는’이라고 말한다”고 한 가토 슈이치의 지적에 맞장구 치며 소개한 에피소드다.

관사의 사용과 그에 따른 성수 일치를 통해 대상을 특정하는 언어적 습관이 있는 화자들과 대조적으로 한국어를 포함한 관사 없는 언어의 사용자들은 명사를 애매하게 처리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한 사람인지, 많은 사람인지, 모든 사람인지를 알 길이 없으니 엄밀한 사고와 일관된 논리가 어려워진다. 사고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분류한다는 것이고, 분류에 기반해 비교-대조-종합하는 과정인데, 명확한 분류 없이 언어를 사용해 버리면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른 의미로 각자의 말을 하는 소통의 불일치가 일어나게 된다. 정의(definition)가 다른데 어떻게 합의가 가능할까. 사회적 논란이 첨예한 이슈들 대부분이 이 같은 언어적 환경 속에서 발생하는데, 최근 가장 도드라진 것이 수십 년째 한 발짝도 논의의 진전이 없는 낙태권 논쟁이다.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선택권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를 놓고 각자가 각자의 말을 해온 이 이슈는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온 ‘낙태죄 폐지 청원’의 참여인이 20만명을 훌쩍 넘기며 청와대의 입장 발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때 청원자들과 반대자들이 말하는 낙태는 어떤 낙태일까. 임신초기가 종료되는 12주까지의 태아인가, 모체 밖에서 독자 생존이 가능해지는 24주 이전까지의 태아인가. 생명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말할 때 이 생명은 수정란인가, 수정 후 8주까지의 배아인가, 총 40주의 임신 기간 중 출산예정일을 하루 앞둔 태아인가. 이에 대한 기본적 개념합의가 없으니 낙태는 살인이라는 주장과 정자도 생명이니 자위를 금지해야 한다는 반론이 불필요하게 맞선다.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것은 어떤 낙태이며, 여성의 행복추구권보다 소중한 생명은 과연 어떤 생명인지 이제는 구체적으로 사안을 특정해 논의해야 할 때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은 모두 중요해서 하나만 고를 수 없다. 이 양자택일의 프레임은 함정이다. 어떤 상황에서 무엇이 더 우선권을 가지냐의 문제일 뿐, 둘 다 소중하다. 고로 논쟁의 초점을 낙태에 대한 찬성이냐 반대냐의 이분법에서 어떤 낙태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대하느냐의 다양한 선택지들로 옮겨야 한다.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낙태는 부분적으로만 합법이다. 196개국 중 어떤 경우에도 임신중단을 할 수 없는 나라는 6 개국(엘살바도르, 몰타, 바티칸, 칠레, 도미니카공화국, 니카라과), 낙태에 대한 어떠한 제한도 두지 않는 나라는 4개국(캐나다, 중국, 베트남, 북한)뿐이다. 산모의 건강 등 제한된 이유로만 낙태를 허용하는 국가가 134개국, 제한된 기간 안에 어떤 이유로든 여성이 원하면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나라가 58개국이다. 그 기준도 제 각각이다. 그리스 독일 덴마크 벨기에 프랑스 핀란드 등 대부분의 국가가 임신 초기인 12주까지, 스웨덴이 18주까지, 영국과 네덜란드가 24주까지 산모의 요구에 의한 임신중절을 허용한다. 미국도 주마다 6주, 12주, 20주, 22주, 24~26주, 28주, 제한 없음으로 기준이 제 각각이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가장 폭넓게 인정하는 이들 국가에서도 건강상의 위험 등 특별한 이유 없이 제한 시기를 넘어 임신을 중단하면 불법이다.

모든 생명이 최초에 기거하는 자궁을 지닌 존재로서 여성에게는 아기를 낳을지 말지를 결정할 독점적인 권한이 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어미의 자궁을 빌리지 않으면 탄생할 방법이 없으므로 그 독점적 권한의 행사에는 적정한 제한이 불가피하다. 두 주체가 한 몸에 기거하는 경이이자 모순이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그 적정한 제한선이 어디인가’이지 낙태 자체에 대한 소모적인 찬반 논쟁이 아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현행 낙태죄 규정은 반드시 전반적으로 손봐야 하며, 이때 논의의 초점은 어떤 낙태인가에 있어야 한다. 때마침 유남석 헌법재판관 후보자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 임신 초기 인공 임신중절을 허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드디어 시기를 놓고 논쟁할 수 있는 시기가 왔다. 여성의 자기결정권만으로 임신 중단이 가능한 시기로 12주에서 16주 사이를 서성이고 있는 나는 이제 이 주제를 놓고 누군가와 토론하고 싶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불가능한 요구에 더 이상은 시달리고 싶지 않다.

박선영 기획취재부 차장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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