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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로렌엔 왜 시계가 없나” 그 이유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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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로렌엔 왜 시계가 없나” 그 이유를 찾아서...

입력
2017.04.2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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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나치 시공간을 넘어

로렌을 연결고리로 한 사람들

각각의 에피소드가 띠로 연결

●외국 소설 번역 같다는 평에…

“다른 스타일로 써보려고 고민

잘하는 방법이 최선이라 포기”

손보미 작가는 “한동안 더 재미있게 쓸 수 있는 이야기를 제대로 못 쓰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했고 그 고민을 담은 소설 속에 담았다”고 말했다. 왕태석 기자 kingwang@hankookilbo.com
손보미 작가는 “한동안 더 재미있게 쓸 수 있는 이야기를 제대로 못 쓰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했고 그 고민을 담은 소설 속에 담았다”고 말했다. 왕태석 기자 kingwang@hankookilbo.com

당신이 소설을 읽다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났다고 하자. 다음 중 가장 ‘요즘 감각’의 표현은? ①원장 할머니는 차를 타고 갔다 ②원장 할머니는 소형차를 타고 갔다 ③원장 할머니는 티볼리를 타고 갔다. 정답은 당연히 ③번 ‘티볼리를 타고 갔다’. 원장 할머니의 재력과 취향과 라이프 스타일은 차보다는 소형차가, 소형차보다는 티볼리가 더 구체적이고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적재적소에 정확한 표현을 감정과잉 없이 경제적으로 드러내는 ‘미국식 소설’이 십 수년 간 문학계 트렌드로 떠올랐을 때, 꼭 이런 방식의 작품을 선보인 소설가 손보미(37)가 등장했다. 그는 2011년 데뷔 직후부터 상복이 이어지며(2012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대상, 2013 한국일보문학상) 단번에 기대주로 떠올랐다. 미국 드라마와 영화와 책에서 얻은 영감을 밑천으로 한, 다시 말해 작가 자신의 경험을 쓰지 않는 견고한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잘 읽히고’ ‘재미있다’는 사실. 2013년 낸 첫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문학동네)은 초판도 소화하기 어렵다는 출판시장에서 6쇄를 찍었다.

손보미가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문학동네)을 냈다. 작가는 서울 강남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199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실패한 유학생 ‘종수’의 삶을, 이 시기 모든 청춘들의 유니폼이었던 브랜드(폴로)의 창시자인 디자이너 랄프 로렌으로 호출한다.

18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만난 손보미는 이 소설을 “25살에 쓰려다 실패했던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저보다 4살 어린 막내 동생이 고등학생 때 유행하던 랄프 로렌 코트 사달라고 엄마 턱밑에서 그렇게 졸랐어요. 결국 엄마가 사주셨는데 그걸 보면서 랄프 로렌을 소재로 뭔가 써야겠다고 생각했죠.”

학창시절부터 만화 스토리를 지어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게 취미였던 작가는 국문과에 진학했고, 소설창작 동아리에 들었다. 막내 동생의 집착을 본 뒤 ‘랄프 로렌 컬렉션을 모으는 애가 있다면?’ ‘그 애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랄프 로렌 컬렉션을 완성한다면?’ ‘그런데 단 한 개 아이템을 절대 구할 수 없다면?’ 같은 상황을 계속 던져가며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안 써지더라고요! 화자를 어떻게 설정할지, 인물이나 사건의 시간을 어떻게 교차시킬지 요령이 없었던 거죠.” 작가는 문학상 몇 개를 받은 후 같은 제목의 단편을 썼고, 그럼에도 “더 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장편을 썼다.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을 낸 소설가 손보미 . 왕태석 기자 kingwang@hankookilbo.com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을 낸 소설가 손보미 . 왕태석 기자 kingwang@hankookilbo.com

미국 유학 9년째인 종수는 세계적인 물리학자이자 지도교수인 기쿠 박사에게서 “여기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빙빙 돌려 말했지만 대학원에서 나가달라는 충고를 듣는다. 집에 돌아와 통음하며 방안을 헤집던 중 잠긴 책상 서랍을 발견하고 망치를 내리쳐 연 서랍에서 6년 간 잊고 있던 청첩장을 발견한다.

“디어 종수, 나는 아주 잘 지내. 곧 결혼식을 올릴 거야. 나는 무척 행복해. 너도 잘 지내길 바란다.” 첫사랑 수영이 보낸 청첩장은 종수를 18살 고교시절로 되돌려 놓는다. 수영은 손보미가 작가를 꿈꿀 때부터 구상했던 ‘랄프 로렌 컬렉션 모으는 아이’다. 수영은 랄프 로렌이 손목시계만은 제작하지 않자 그에게 영문 편지를 쓰기로 결심하고 “전교 3등을 벗어난 적 없는” 종수를 찾아가 번역을 부탁한다. 첫사랑의 추억을 새록새록 되새기던 종수가 랄프 로렌이 시계를 만들지 않은 이유를 찾아 나서며 이야기는 궤도에 오른다.

가깝게는 종수가 유학에 실패한 최근부터 멀게는 1930년대 나치의 유대인 박해까지 시공간을 넘어 펼쳐지는 이야기는 읽는 내내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가늠하게 한다. 작가는 “소설 속 기쿠 박사는 미츠오 카쿠 뉴욕대 석좌교수를 모델로 한 것이고, 간호사 섀넌 헤이스는 빌 헤이스의 논픽션 ‘5리터’ 속 인물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힌트를 준다. 문장만큼이나 구성도 견고한 작가는 각기 다른 시공간의 에피소드들을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시켜놓았다. 이를테면 기쿠 박사가 노벨상 수상 실패 때마다 피겨 스케이트를 타는 장면은 랄프 로렌을 거두어 키운 전설의 시계공 조셉 프랭클이 형편없는 실력으로 매일 권투장에서 얻어터지는 장면과 겹친다. 소설의 결말 부분, 프랭클이 일기에 쓴 고백은 그가 매일 권투장에서 얻어터지다 일흔에 권투와 시계 수리 모두를 그만 둔 사연을 은유한다. “랄프 로렌을 연결고리로 한” 각각의 사연들은 종수가 어느새 첫사랑을 잊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 다시 끝낼 때까지 이어진다.

그렇다면 소설 속 랄프 로렌의 삶은? 일부는 팩트, 다수는 작가의 상상이란다. ‘이런 소설이 한국에서 쓰였다는 걸 랄프 로렌사(社)가 알면 좋아하지 않을까?’란 질문에 작가는 “명예훼손이라 할 것”이라고 농을 던졌다. “제가 랄프 로렌에서 갖고 온 이미지는 한때 유행했지만 지금은 거의 입지 않는, 쇠락한 이미지거든요. 하지만 뉴욕엔 엄청 큰 랄프 로렌 매장이 있어요. 여전히 남아 있지만 예전 영광을 누릴 수 없는 어떤 것, 그게 랄프 로렌 이미지입니다(웃음).”

그는 데뷔 이래 줄곧 ‘외국 소설 번역 같다’는 평을 듣는다. 이런 특징이 장점이자 한계로 소개된다. 작가는 “의도한 건 아니”라고, “이렇게 쓰는 게 맞는 건지 벽을 많이 느꼈다”고 말했다. “한때 저와 다른 스타일을 써보고도 싶다고 생각했어요. 제 능력을 과대평가한거죠(웃음). (이제) 제가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최선의 것을 써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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