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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피로 누적 사회

입력
2017.01.11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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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 작가라는 직업으로 자기 소개를 해야 할 때면, 사람들은 대체로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프리랜서라니 부럽네요. 자유로우실 것 같아요.” “출근하지 않으니 좋으시겠어요.” 물론 출근은 없고, 시간의 유용도 회사원보다 비교적 자유롭다. 하지만 출근이 없으므로 퇴근도 없는 것이 프리랜서의 삶이다. 원고의 마감일은 어쩌면 그렇게 짠 것처럼 비슷한 시기로 몰리고, 취재나 촬영 일정도 기가 막히게 겹치는지 모르겠다. 작가라는 이름이 쓰이는 온갖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니 이제 자리에 앉아 글을 쓰는 시간은 하는 일의 일부가 되었고,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 이곳 저곳으로 나를 끌고 다니는 발은 키보드 위의 손만큼 바빠졌다. 보장된 휴가도 4대 보험도 퇴직금도 없으니 일단 들어온 일을 섣불리 거절해서는 안 된다.

일단 들어오는 일들을 모두 하다 보니 연말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 지으려는 ‘갑’들의 요청이 겹쳐 12월 초순에서 중반 사이 나의 ‘바쁨 지수’는 연 최대치로 치솟았다. 눈을 뜸과 동시에 메일을 확인하고 취재와 미팅 사이, 인터뷰와 마감 사이를 쉼 없이 서성이던 어느 날, 조는 것도 깨어있는 것도 아닌 상태로 인터뷰 장소를 향하던 중 문득 어디선가 본 피로회복제 약병을 떠올렸다. 졸던 사람이 눈을 뜨고 남은 하루를 거뜬하게 만든다는 약을 털어 넣으면 기분이라도 나아질 듯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 피로회복제의 효과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정신이 ‘반짝’ 들어 인터뷰는 제정신으로 마무리했지만, 효과는 바로 사라졌다. 좀 더 많은 약을 조합한 ‘SNS 특제 피로회복제 세트’도 비슷했다. 연속된 밤샘의 여파와 누적된 피로를 마법처럼 사라지게 할 약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요리를 하다 실패하는 과정, 잘못된 식당 선택을 중계하듯 피로회복제 구매 과정을 기록한 SNS의 글 타래가 폭발적으로 공유되기 시작한 것이다. 바이럴 마케팅을 의심하는 멘션(글쓴이에게 직접 보내는 댓글)이 오기도 했고, 효과는 어떤지 복용 방법이 어떻게 되는지를 묻기도 했다. 며칠 그러다 곧 잠잠해지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잊을 만하면 공유 알림이 오더니, 결국 해를 넘겨 한 달이 지난 지금 공유 횟수가 1만 7,000회를 넘어서고 말았다. 너무 많은 사람이, 피로한 탓이다. 사람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좋아요’ 버튼을 누를 때마다 나의 알림 창에는 피로한 사람들의 무거운 눈꺼풀과 몇 겹의 피로가 쌓여간다. 한병철의 책 ‘피로사회’가 한국 사회를 ‘피로 사회’로 명명한 지 5년, 피로는 모두에게 누적되었다.

지난 연말, 탄핵안이 가결될 때까지 매주 토요일 광화문으로 향하면서 생각했다. 이 시간에 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워서 TV를 보고 책을 읽고, 여유로운 토요일 오후를 보낼 수 있다면 그래도 얼마 간의 피로는 풀리지 않을까. 이미 세상 그 어느 나라의 국민보다 긴 시간 일하고, 일하지 않으면 취업을 준비하고, 공부하고, 제대로 쉬지도 놀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그나마 시간도 쪼개어 나라 걱정을 해야 하고 쉴 때조차 불안함과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지난해 10월 이후, 한국인의 삶은 얼마나 더 피곤해졌을까. 오늘도 자양강장제 광고는 이런 말을 건넨다. “세상 사는 게 피로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는 게 다 그렇다는 말로 이 누적된 피로를 당연시하고 싶지 않다. 피로하지 않은 사회에서 피로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 피로를 약을 통해, 의지를 통해, 운동을 통해 이겨내라는 격려는 사실 쓸모가 없다. 누적된 피로의 원인을 덜어주고, 덜 피로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도자와 정치인, 그리고 시스템이 필요하다. 일상의 피로라면 사실 커피 정도로 풀려야 하는 것이다.

윤이나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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