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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현대’를 연 군소정당 당수

입력
2016.06.18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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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마르코 판넬라

이탈리아의 정치인 마르코 판넬라는 60년간 지지율 1%대의 군소정당 ‘급진당’을 이끌며 이념과 종교, 거기 묶인 정치의 수많은 억압에 맞섰다. 그의 급진당은 지금도 여전히 군소정당이지만, 그의 조국은 그 덕에 급진적으로 근대화했다. 위키피디아.
이탈리아의 정치인 마르코 판넬라는 60년간 지지율 1%대의 군소정당 ‘급진당’을 이끌며 이념과 종교, 거기 묶인 정치의 수많은 억압에 맞섰다. 그의 급진당은 지금도 여전히 군소정당이지만, 그의 조국은 그 덕에 급진적으로 근대화했다. 위키피디아.

급진당(Italian Radical Party)이라는 이탈리아 정당이 있다. 1955년 창당 이래 지금껏 그 이름 그대로 버텨온 꽤 전통 있는 정당이지만, 총선 득표율은 1%를 넘긴 예가 드물다. 1979년 총선(정당비례대표제)에서 3.4%를 득표, 하원 630개 의석 중 18석을 차지한 적이 있지만, 2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 정치사를 요약한 글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표현인 ‘군소정당 난립’의 그 군소정당 중 하나다. ‘급진’은 그 자체로 이념은 아니다. 좌우 이념으로 나뉜 이탈리아의 전통적 3대 정당(기독민주당, 공산당, 사회당)과 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정당(베를루스코니의 ‘포르차 이탈리아’와 북부동맹)들 틈바구니에서 ‘급진’은 애당초 미덥지 않은 깃발이었다.

이탈리아 급진당은 낯설어도, 87년 선거에 포르노 배우이자 미술가 제프 쿤스(Jeff Koons)의 전 부인인 일로나 스탈레르(Ilona Staller, 예명 치치올리나)를 후보로 내세워 당선시킨 정당이라고 하면 ‘아~’하는 이들이 더러 있겠다. ‘다중’과 ‘제국’의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가 79년 모로 전 수상 납치 암살 연루 등 혐의(반국가단체 조직ㆍ모의 등)로 체포된 뒤 의원면책특권을 얻자고 83년 선거 때 가담한 정당이 급진당이었다는 걸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 당을 만들고 이끌어온 이가 마르코 판넬라(Marco Pannella)다. 그는 비록 군소정당의 당수였지만 이탈리아와 유럽연합 정치무대에서 존재감 있는 정치인이었다. 그의 영향력은 독보적 정치력과 추구해온 공적 가치, 튀는 정치 스타일 덕이 컸다. 이혼과 낙태, 정치부패 근절, 양심적 병역거부, 마리화나 합법화, 존엄사, 반파시즘ㆍ반전, 사형제 반대, 수형자 인권운동…. 그는 현안에 따라 좌우를 넘나들면서, 바티칸의 교황과 시민사회의 종교적 도그마에 맞서면서, 유럽 중세의 가을을 가장 마지막까지 품었던 조국 이탈리아를 근대로, 급진적으로 이끌고자, 말 그대로 목숨 걸고 분투했다.

이탈리아의 수많은 유권자들은, 비록 선거에서 급진당에 표를 주는 덴 인색했지만, 그가 정치 무대에서 사라지는 건 더 원치 않았다. 76~94년 이탈리아 하원의원과 79~2009년 유럽의회 의원을 지낸 마르코 판넬라가 5월 19일 별세했다. 향년 86세.

1974년 전까지 이탈리아는 이혼이 불법이었다. 사회당(PSI) 의원 로리스 포르투나(Loris Fortuna, 1924~1985)가 이혼법을 입안한 건 65년이었고, 하원에 상정한 건 70년이었다. 바티칸과 다수당인 기독민주당(CDI)이 최대 걸림돌이었다. 군소정당의 원외 당수 판넬라는 법안 통과를 촉구하며 생애 첫 단식을 감행했다. 그는 하루 세 잔의 커피와 비타민으로 장장 78일을 버텼다. 그 해 말 의회가 법안을 승인한 것을 전적으로 그의 살 28Kg 덕이라 말할 순 없지만, 그의 단식은 70년대 이탈리아 페미니즘 운동의 기폭제였고 의회 내 반기독당 연대의 촉매였음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이탈리아 의회는 주요 법률사안에 대해 국민투표(referendum)로 승인 여부를 묻는다. 그의 급진당은 ‘이혼연대(Italian League for Divorce)’ 를 결성, 페미니스트 단체들과 함께 서명운동 등 캠페인을 주도했고, 이혼법은 74년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됐다. 2년 뒤 그가 하원의원이 된 것도 그 덕이 컸다.

의원이 된 뒤 그는 낙태 허용법안(Law 194)을 발의했다. 임신 3개월 이내의 낙태를 허용하자는 그의 법안은 우파 정당들의 거센 반발 속에 78년 5월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됐다. 스페인 신문 ‘엘 파이스’가 “나이아가라 폭포 같다”고 썼을 만큼 말하기 좋아하던 그였다. 투표에 앞서 유권자들에게 법안이 충분히 홍보되지 않은 데 항의하기 위해 그는 의회 연단에 서서 장장 25분간 침묵했다.

‘낙태법’은 기독민주당의 요구로 81년 5월 재차 법안 폐지 국민투표에 붙여졌고, 유권자 67.9%가 폐지에 반대했다. 교황청은 바오로2세 재임기는 물론이고 이후로도 수시로 낙태법을 공격했다. 2008년 베네딕토16세 교황이 “낙태는 여성과 가족들의 고통을 해결하지 못했고 (생명 경시 등으로) 지난 30년간 새로운 상처를 안겨왔다”며 법안 폐지를 촉구하자 판넬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라며 단 한 마디로 일축했다.

그와 교황청은 앙숙이었다. 78년 취임한 교황 바오로2세가 이듬해 첫 부활절 축원 교서(Urbi et Orbi, ‘로마와 온 세상을 향해’라는 뜻)를 낭독하던 베드로 광장에서, 판넬라는 비신자 8,000여명을 이끌고 국제아동 기아 근절 피켓 시위를 벌였다. 뉴욕타임스는 “교황은 묵묵히 행진의 뜻을 수용해 ‘약자인 어린이들 역시 그리스도가 특별히 사랑하는 존재’라고 덧붙였다”고 전했다.

마르코 판넬라는 1930년 5월 2일 이탈리아 아브루초(Abruzzo, 현 Teramo)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지아신토(Giacinto, 히야신스의 이탈리아어)였지만, 공무원의 실수로 호적에 등재되지 않은 중간 이름 ‘마르코’을 그는 선호했다. 이탈리아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 리게티(Righetti)라는 반 파시스트 음악가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우며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유대인 여자친구가 학교에서 쫓겨나 추방 당하는 걸 본 적도 있었다고 한다. 10대 전반기의 이탈리아는 전쟁터였고, 그는 연합군의 폭격과 나치의 퇴각을 지켜보았다. 55년 로마 우르비노(Urbino)대학서 법학 학위를 받은 뒤 약 1년간 변호사 생활을 했고, 배우 에르네스토 로시(Ernesto Rossi), 언론인 출신 정치인 마리오 판눈치오(Mario pannunzio)등과 함께 55년 급진당을 창당했다.

대학 시절 그는 자유당(LP) 학생위원회 의장과 전국대학학생연맹의장(UNURI)을 지냈다. 기성 정당에서 권력정치를 지향하기에 무척 유리했을 저 이력들에도 불구하고 그가 급진당을 창당한 까닭은, 이념과 종교로 경직된 현실 정치에 대한 실망과 반감 때문이었다. 80년 8월 엘 파이스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급진주의라는 말을 써본 적이 없다. 이념적 개념 자체를 거부한다. 내게 이념(ideology)은 신학(theology)의 대용품일 뿐이고, 급진당은 전통 정당들 같은 ‘교회 정당(party- church)’이 아니다. 그 정당들은 모든 문제, 심지어 단 한 번도 토론하거나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서조차 이미 답을 마련해두고 있다. 하지만 정치란 무엇보다 창조적이어야 한다. 원칙과 목표, 방법론, 게임의 룰도 중요하지만, 지나치게 엄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급진당 당원들은 어떤 사안에 투표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다른 정당에 중복 가입할 수도 있고, 살인자라고 해서 출당 당하는 일도 없다고 말했다. 그가 당수를 맡은 건 우왕좌왕하던 당이 해체될 위기에 처했던 63년이었다. 당을 살린 것도 65년 시작한 그의 이혼법 캠페인이었다.

판넬라는 73년 ‘Liberation Daily’라는 신문을 만들어 1년 가까이 발행했고, 77년에는 지금도 건재한 라디오 방송국 ‘Radio Radicale’을 만들었다. 그는 특정 이슈를 두고 불특정 청취자와 전화로 즉석 토론을 벌이는 생방송을 86~93년까지 진행하며 파시스트 섹시스트 등과도 자주 설전을 벌였고, 욕설과 인종주의적 발언까지 ‘표현의 자유’라며 받아넘기곤 했다.(가디언, 16.5.25)

2007년 로마 성베드로대성당 앞의 판넬라. 그는 저 피켓을 한시도 내려놓지 않았다. AP 연합뉴스
2007년 로마 성베드로대성당 앞의 판넬라. 그는 저 피켓을 한시도 내려놓지 않았다. AP 연합뉴스

그는 95년 로마 피아자 나보나(Piazza Navona) 광장에서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시민들에게 마리화나를 공짜로 나눠줘 3개월 징역형(벌금 3,650달러로 감형)을 받았고(NYT, 2016.5.20), 재정정책- 정당기부금 관련-에 항의해 로빈 후드로 분장하고 이탈리아 북부 트레비소(Treviso)에서 시민 수천 명에서 14만8,000달러를 나눠준 적도 있었다. 그는 그 돈이 “이탈리아 국민들로부터 정당들이 훔친 돈”이라고만 말하고 구체적으로 어디서 나온 돈인지는 밝히지 않았다.(WSJ, 16.5.24)

1992년 사회당 밀라노지부장 마리오 키에자(Mario Chiesa)의 뇌물수수 사건으로 시작된 부정부패 척결작업 ‘마니 풀리테(Mani Puliteㆍ깨끗한 손)’는 주요 정치인 경제인 거의 전원이 연루돼 무려 3,200명이 재판을 받은 초유의 부패사건이었다. 공공공사 입찰 비리를 눈감아주는 조건으로 정치권에 전달되는 정치자금의 ‘공식 비율’이 공사비의 10%였다는 사실, 그 검은 돈의 정당별 분배비율- 사회당 40%, 공산당 20%, 기민당 20%, 군소정당 20%-까지 책정돼 있었다는 사실이 수사 과정서 밝혀졌다.(‘현대 이탈리아 정치 사회’ 김종법 지음, 바오 발행) 주요 정당들이 몰락했고, 과도정부가 구성됐고, 93년 국민투표에 의해 이탈리아 1-2공화국의 경계가 된 선거제도 개혁이 이뤄졌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의원을 선출하던 기존 방식도 75%의 소선거구제와 25% 비례대표제 선출 방식으로 바뀌었다. ‘마니 풀리테’의 영웅이라면 당연히 부패 척결수사의 선봉이었던 디 피에트로(Di Pietro) 검사를 꼽아야 할 테지만, 그 이전에 판넬라 같은 정치인이 있었다.

그는 68년 동구 민주화운동을 벌이다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구금되기도 했고, 83년 시실리에 미군 크루즈미사일이 배치되자 이탈리아 전역의 군기지 리스트와 핵무기 배치도를 공개하기도 했다. 철새 사냥 금지도 급진당이 제기한 이슈 중 하나였다. 스페인의 저명 작가 페르난도 사바테르(Fernando Savater)가 그와 함께 마드리드의 한 식당에 갔는데, 사냥 마니아였던 식당 주인이 직접 사냥한 뇌조구이를 특별 서비스로 내온 일이 있었다고 한다. 사바테르는 판넬라가 잠깐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금세 “그 특유의 마법의 미소를 띠며 ‘뭐, 이 뇌조들은 이미 죽은 거죠? 맞죠? 맛있게 먹읍시다’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사바테르는 그가 머리띠를 푼 게 인정 때문인지 음식 때문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필요에 따라선 좌우파를 안 가리고 손을 잡았고, 94년 선거땐 베를루스코니를 지지하기도 했던 그는 기회주의자라 비난당하곤 했다. 온갖 이슈에 목청을 높여대 “판넬라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라면 장례식장에서 관속에라도 드러누울 사람”(가디언, 위 기사)이라는 비아냥을 들은 적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어떤 이슈에는 목숨 건 단식을 숱하게 감행했다. 말년의 재소자 인권문제도 그 중 하나였다. 감옥의 과밀수용 실태 개선을 촉구하며 생애 마지막 단식을 이어가던 2014년 4월 25일, 프랜시스 교황이 전화를 걸어 자기가 노력할 테니 단식을 중단하라고 설득한 일도 있었다. 긴 불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아나 재소자 인권 등 어떤 현안에서는 바티칸과도 손을 잡았고, 프랜시스 교황과는 특히 잘 지내, 교황은 자신의 대담집 ‘신의 자비 God’s Mercy’를 생일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무신론자인 판넬라는 달라이 라마와도 내내 각별한 친분을 유지했다.

그는 법적인 독신이었지만, 산부인과 의사이자 동지인 미렐라 파라치니(Mirella Parachini)와 1974년부터 “서로에게 자유로운” 파트너 관계를 공개적으로 유지해왔다. 그는 양성애자였다. 2010년 5월 BBC 인터뷰에서 그는 “서너 명의 남성과 깊은 연애를 한 적이 있다.(…) 몇 차례 여성들과도 연애를 했는데, 세상 어딘가에 나를 꼭 닮은 아이가 50명쯤 있을지도 모른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그에겐 자녀가 없었다.

판넬라는 98년 관상동맥 이상으로 4중 심장 우회수술을 받은 이래 여러 차례 다양한 질병으로 병원 신세를 지곤 했다. 간암과 폐암 진단을 받은 것은 마지막 단식 직후인 2014년 여름이었다. 애연가였던 그는 입원을 마다하고 로마의 자택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여전히 굴뚝처럼 담배를 피워댔고, ‘말보로’담뱃값에 적힌 ‘smoking kills’라는 문구 뒤에다 ‘if banned’라는 말을 덧붙이며 킬킬대곤 했다고 한다.(corriere, 2016.4.19) 그는 숨을 거두기 사흘 전 병원에 입원했다. 막바지 고통을 견디던 그에게 파라치니가 진정제를 원하느냐고 묻자 그는 “고맙다”고 말했다고, 그게 그의 생애 마지막 말이었다고 이탈리아 신문 ‘코리에르’는 전했다.(corriere, 16.5.20) ‘나이아가라 폭포’의 그 마지막 아름다운 한 방울에 교황청과 유럽의 수많은 정치인들이 폭포처럼 고마움을 쏟아냈다. 가장 간결하고도 강렬한 것은 이탈리아의 ‘무신론자-불가지론자 협회’ 의장 스테파노 잉카니(Stefano Incani)의 추도사였다. “그의 헌신이 없었다면 이 나라가 지금 같지 못했을 것이다.”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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