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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좋은 게 좋은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입력
2018.02.19 14:34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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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6년(1406년) 4월 명나라 환관 겸 사신인 황엄(黃儼) 일행이 조선을 방문했다. 태종이 사신들 숙소인 태평관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황엄을 따라온 한첩목아(韓帖木兒)라는 조선 출신 명나라 환관이 태종에게 묘한 말을 했다. 제주도 법화사에 있는 아미타삼존불상은 원나라 때 만들었으니 결국 자신들 것이므로 가져가겠다고 했다. 유머를 알았던 태종이 웃으며 말했다. “마땅하고 말고요. 다만 바다를 건너오다가 부처 귀에 물이 들어갈까 두렵소.”

사실 그들의 목적은 불상이 아니라 제주도 정탐임을 태종은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태종은 미리 사람을 보내 불상을 전라도 나주에 갖다 놓으라고 지시해 놓았다. 더불어 최측근인 박석명을 전라ㆍ제주 도체찰사로 임명해 25일 출발하는 황엄 일행과 동행하게 했다. 한편 태종의 명을 받은 김도생 일행은 17일 만에 제주도 불상을 나주에 갖다 놓았다. 결국 황엄 일행은 전라도 나주에서 불상을 받아 돌아온다. 애초의 목적은 이루지 못했다.

태종과 황엄의 신경전은 황엄 일행이 한양으로 돌아온 7월 16일부터 본격화한다. 태종은 황엄이 돌아올 때 몸이 불편하다며 마중을 나가지 않았다. 실은 그들이 한양을 떠날 때도 병을 핑계로 환송하지 않았다. 결국 이틀이 지나서야 태종은 태평관을 찾았다. 여기서 뜻하지 않은 설전이 벌어진다. 황엄이 제주에서 가져온 불상에 태종이 예(禮)를 행할 것을 요구했다. 태종은 거절했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사신들을 위한 것이지 불상을 위한 것이 아니오. 그리고 만일 이 불상이 중국에서 왔다면 내가 마땅히 절해 공경의 뜻을 표해야 옳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 절할 필요가 있겠소?”

당시 중국 황제인 영락제는 열렬한 불교도이기도 했다. 반면에 태종은 확고한 숭유억불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태종으로서도 부담스러웠던지 의정부 정승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런데 자신이 가장 신뢰했던 좌의정 하륜과 우의정 조영무는 “황엄의 사람됨이 난폭하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니 임시방편으로 예불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태종은 크게 화를 냈다. “내가 두 정승을 믿고서 불상에 절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모두 ‘절을 해야 한다’고 하니 무슨 까닭인가? 이번에 보니 나의 신하 중에 의로움을 지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겠다. 여러 신하들이 황엄 한 사람을 두려워함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의로움을 지켜 임금의 어려움을 구할 수 있겠는가? 고려의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갔을 때, 고려 신하들 중에서 충혜왕을 구원하려 드는 자가 없었다. 내가 위태롭고 어려움을 당해도 역시 이와 같을 것이다.”

결국 태종 홀로 황엄에 맞섰다. “우리 조선의 화복(禍福)은 천자의 손에 달려 있지 불상에 있는 게 아니오.” 사실 조선은 태종이 영락제로부터 책봉을 받아 당시로서 정식 국가로 승인 받은 은혜가 있었다. 그러나 사리(事理)에 밝은 태종은 작은 나라일수록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최후 통첩을 받은 황엄은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이 없었다. 태종은 끝내 예불하지 않았다. 그 후 황엄은 친(親)조선 인물로 돌아섰다.

특히 태종 말기에 오로지 자신의 결단에 의해 양녕을 폐세자하고 충녕대군으로 교체할 때 명나라 조정의 의심을 살 수밖에 없었는데도 세자 교체에 이어 전격적 선위를 할 수 있었던 데는 황엄이 가운데서 잘 주선한 바 컸다. 세자 교체를 전하려던 조선 사신단을 만난 황엄이 이미 충녕으로 교체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데서 이 점이 드러난다. 이것이 외교다.

최근 과공(過恭)과 무례(無禮)가 국민 마음을 상하게 한 것 같아 600년 전의 작은 일화에서나마 위안을 찾아보았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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