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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파자(破字)

입력
2016.12.0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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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기 전 누군가 자신의 집을 찾아와 “지리산 바위에서 얻었다”며 ‘木子乘猪下(목자승저하) 復正三韓境(복정삼한경)’이라는 글을 바쳤다는 대목이 태조실록에 나온다. ‘목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 삼한을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木子’는 이(李)씨를 이르는 파자(破字)다. 조선 건국의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나라를 세울 여러 징조를 기록한 일화 중 하나다. 한자 자획을 나누고 합해 뜻을 풀이하는 파자는 고래로부터 유행한 점술이자 놀이이기도 하다.

▦ 파자는 참서(예언서)에 자주 등장하고, 백성을 현혹하고 모의나 반란의 정당성을 갖기 위해 곧잘 쓰였다. 중종 때 개혁가인 조광조의 역모 누명사건이 대표적 예다. 남곤을 비롯한 훈구파는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해 궁궐의 나뭇잎에 꿀로 ‘走肖爲王’(주초위왕ㆍ주초가 왕이 된다)을 쓴 뒤 벌레가 파먹게 했다. 기묘사화의 발단이다. 주초는 趙(조)의 파자로,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소문은 임금의 눈을 멀게 했다. 선조 때의 정여립은 ‘木子亡(목자망) 奠邑興(전읍흥)’글자를 새긴 옥판을 지리산 토굴에 묻어 뒷날 패거리들과 함께 찾은 뒤 모반을 일으켰다. ‘奠邑’은 정(鄭)씨의 파자다.

▦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인 1980년대에 파다했던 파자 얘기도 있다. 그의 비극적 운명이 이름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복(卜)이 있어 18년(十八)간 집권했지만(朴) 1년(一)만 하고 그쳤어야(止)했는데(正), 자식(巳)처럼 총애하던 신하(臣)의 총탄(....)에 암살당했다(熙)는 식의 풀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지만 모골이 송연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누가 지은 풀이인지 그럴듯했기 때문이다.

▦ 박근혜 대통령 집안은 ‘18’이라는 숫자와 연이 깊은 모양이다. 박 대통령은 사퇴 의사를 처음 밝힌 3차 대국민 담화에서 “지난 18년간 국민 여러분과 함께 했던 여정은 더없이 소중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박 대통령은 퍼스트 레이디에서 부친 사후 18년간 일반인으로 칩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다가 1998년 4월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2012년 대선 당시 박 대통령 이름을 파자해 당선을 점친 역술가가 있었는데, 탄핵과 하야의 기로에 선 지금은 어떤 파자 풀이로 파란만장한 운명을 그럴듯하게 그릴지.

정진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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