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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평창 올까… ‘올림픽 참가’ 둘러싼 ‘밀당’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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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평창 올까… ‘올림픽 참가’ 둘러싼 ‘밀당’의 역사

입력
2018.01.0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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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5일(현지시간) 브라질 마라카낭 주경기장에서 열린 2016 리우올림픽 개막식에서 북한선수단이 입장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6년 8월 5일(현지시간) 브라질 마라카낭 주경기장에서 열린 2016 리우올림픽 개막식에서 북한선수단이 입장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1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평창 동계올림픽에 대표단 파견 의사를 밝혔다. 이에 청와대는 환영의 뜻을 밝혔고, 통일부는 9일 판문점 회담을 제의했다. 평창 올림픽이 북핵 위협으로 경색된 한반도 위기 국면에서 남북한 대화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한 것이다.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이 남북한 긴장 완화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 사이의 회담은 1971년까지 단 두 차례에 불과했는데, 그 중 하나가 체육 관련 회담이었다. 첫 회담은 1954년 4월 한국전쟁 휴전협정과 관련한 제네바 정치회담이었고, 또 하나가 1964년 도쿄 하계올림픽 단일팀 구성과 참가를 위해 1963년 스위스 로잔과 홍콩에서 열린 체육인 접촉이었다.

60년대…올림픽 국호 표기 놓고 반발해 선수단 철수

1960년대 올림픽에서 북한의 참가를 둘러싼 중요한 이슈는 남북한 단일팀 구성 여부와 북한의 명칭 표기였다.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1국가 1올림픽위원회(NOC)’ 원칙에 따라 분단국에는 선수단 통합을 요구했다. 이에 1950~60년대 동서독은 올림픽에 ‘독일연합(United Team of Germany)’이라는 단일팀으로 참가했다. 한국의 경우 1947년 대한올림픽위원회(KOC)를 발족해 IOC 총회의 승인을 얻었다. 북한은 1950년대 IOC 가입을 시도했으나 KOC 때문에 실패를 거듭하다 1957년에야 ‘북한 NOC의 활동범위를 북한 지역에 국한시키고 올림픽 참가는 한국 KOC의 일원으로 한다’는 조건으로 IOC의 승인을 받을 수 있었고, 1963년 IOC에 공식 가입하게 됐다.

1964년 도쿄 하계올림픽을 앞두고 남북한은 단일 선수단 결성을 위해 세 차례 회담을 가졌으나 어떤 합의도 얻지 못했다. 그러다 북한은 1964년 1월 열린 인스부르크 동계올림픽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선수단 규모는 스피드 스케이팅, 크로스컨트리 등 13명에 불과했지만 한필화 선수가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3,000m에서 은메달을 따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북한은 올림픽에서 공식 국호로 ‘North Korea’ 대신 ‘조선(Chosun)’ 명칭을 사용하겠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어 10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에도 북한은 144명의 개별 선수단을 파견했지만 경기에 참가한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한국의 국호는 ‘Korea’로 표기된 반면 북한은 애초 요구했던 ‘DPRK(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대신 ‘North Korea’로 표기됐고, 이에 반발한 북한이 개막 직전 선수단을 철수시켰기 때문이다.

북한의 국호 표기를 둘러싼 IOC와의 줄다리기는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도 벌어졌다. 멕시코시티 올림픽 직전 IOC는 동독과 대만의 경우 희망 국호를 즉시 사용하도록 했으나 북한에 대해서는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는 ‘North Korea’를 쓰고, 이후 대회부터 ‘DPRK’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결정에 반발해 올림픽 참가를 위해 쿠바에 체류하던 북한 선수단은 또다시 철수했다. 북한은 1972년 뮌헨 하계올림픽에서부터 ‘DPRK’를 국호로 사용할 수 있었다.

2004년 8월 22일(현지시간) 그리스 아테네 갈라치 올림픽홀에서 열린 아테네 올림픽 탁구 여자단식 결승에서 남북한 선수들이 북한의 김향미 선수를 함께 응원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4년 8월 22일(현지시간) 그리스 아테네 갈라치 올림픽홀에서 열린 아테네 올림픽 탁구 여자단식 결승에서 남북한 선수들이 북한의 김향미 선수를 함께 응원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80년대…이념으로 갈린 반쪽 올림픽

1980년대 올림픽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간 이념 대결의 장이었다. 특히 규모가 큰 하계올림픽은 이러한 경향이 더 두드러졌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1980년 모스크바 하계올림픽에는 미국 등 서방 국가 상당수와 한국, 중국, 일본 등이 불참했다. 북한은 이 대회에서 은메달 3개와 동메달 2개를 땄다.

4년 뒤 미국에서 열린 로스앤젤레스 하계올림픽에는 반대 현상이 벌어졌다. 소련의 주도로 14개 사회주의 국가들이 보이콧을 선언한 것이다. 앞서 남북한은 1983년 아웅산 테러사건 이후 관계가 극도로 경색된 가운데에서도 LA 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해 1984년 4~5월 체육회담을 열었으나 성과 없이 끝났고, 결국 북한도 올림픽 보이콧을 선언했다.

1988년 9월 17일 서울에서 열린 하계올림픽 개막식.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8년 9월 17일 서울에서 열린 하계올림픽 개막식. 한국일보 자료사진

88 서울올림픽 공동 개최 요구하다 결국 보이콧

북한은 1988년 서울올림픽에도 불참했다. 1981년 한국이 88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했을 때 북한은 한반도가 아직 전시 상태라는 이유로 개최지 변경을 요구했다. 1984년 소련이 LA 하계올림픽을 거부하자, 북한은 서울 올림픽 개최에 반대하기도 했다.

개최지 변경 요구가 먹히지 않자 북한은 1985년부터 남북한 공동개최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남북한 사이의 민간 교류가 거의 불가능했던 당시 접촉의 계기로 삼자는 주장이 남한에서도 일부 지지를 얻기도 했다. IOC는 공동개최는 불가, 일부 종목의 분산개최는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북한은 23개 종목 중 8개 종목 경기를 북한에서 열고, ‘서울ㆍ평양 올림픽’이라는 공동개최 명칭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1985년부터 1987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남북한 회담이 이뤄졌으나 분산 개최 여부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소련이 서울 올림픽 참가를 발표했음에도 궁지에 몰린 북한은 불참을 선언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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