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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세상을 그리다] 삶의 저녁에 만난 일상 예술

입력
2017.07.2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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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딸이 농부 아버지를 부추겨 함께 만든 그림책이다. 자신이 경험한 예술적 감흥을 가까운 이와 공유하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을까. 낮은산 제공
작가 딸이 농부 아버지를 부추겨 함께 만든 그림책이다. 자신이 경험한 예술적 감흥을 가까운 이와 공유하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을까. 낮은산 제공

쑥갓 꽃을 그렸어

유춘하ㆍ유현미 지음

낮은산 발행ㆍ36쪽ㆍ1만2,000원

몸이 마른 할아버지가 쪼그려 세운 두 무릎에 턱을 얹고 그림을 그린다. 무념무상, 접의자 위 유리컵에 꽂힌 국화 비슷한 쑥갓 꽃 그리기에 푹 빠진 모습이 아이 같다. 꼭 이런 모습으로 작업했던 화가 장욱진이 떠오른다. ‘쑥갓 꽃을 그렸어’의 표지에는 골똘히 쳐다보고, 그리고, 지우고, 다시 쳐다보고, 다시 그린 몰입의 시간이 흐뭇하게 담겨있다. 일흔두 살에 붓을 들어 아흔두 살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수백 점 그림을 남긴 엠마 스턴 같은 성취를 엮은 그림책일까? 할아버지는 누구일까? 그림 그리는 할아버지를 그린 이는 누구일까?

이 그림책은 유춘하, 유현미 두 사람이 함께 만들었다. 유현미는 영문학 전공의 화가 겸 그림책 작가로, 유춘하의 셋째 딸이다. 평생 농부로 살아온 아흔 살 아버지를 부추기고 격려해 그림을 그리게 했다. 나날이 발전해가는 아버지의 풋풋한 그림을 갈무리하고, 그림 그리면서 흘린 아버지의 말을 받아 적고, 아버지가 그림 그리는 모습이며 손주와 함께 놀고 쉬는 모습을 그려 엮는 데에는 창작 이상의 공력이 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경험한 예술적 감흥을 가까운 이와 공유하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을까.

첫 장면의 주인공 할아버지는 손녀가 쓰던 몽당 크레파스며 새 스케치북을 멀찌감치 밀쳐두고 딸의 권유가 성가시다며 빠져나갈 궁리만 한다. 나이가 구십이라 걷기도 힘든데, 누워서 쉬고만 싶은데, 그림이라곤 전혀 모르는데, 라며 투덜댄다. 그러나 토끼와 새와 생쥐를 크레파스로 그려보고 주말농장에서 주워온 자두를 물감으로 그려본 다음엔 이 낯선 농사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표지의 그 쑥갓 꽃 그리기에 이르러서는 자발적 연구 모드로 자신감을 더하고, 어항 속 물고기 그리기 과제에도 호기롭게 대응한다.

이제 딸은 아버지와 그림 도구를 싣고 스케치 소풍을 떠난다. 경기 파주 반구정 마루에 앉아 멀찌감치 보이는 임진강과 송전탑을 그리는 할아버지의 옆뒷모습 그림, 그에 이어 펼쳐지는 할아버지의 그림과 그 장면에 담긴 텍스트, 눈물 어린 마음인 듯 뿌옇게 물감을 흘린 배경에 그린 기차 선로며 역이며 고향 사람들이며 철조망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딸의 프로젝트가 ‘아버지, 일상 예술을 즐기다’ 이상임을 진술한다. 아버지는 황해도 신천군 가산면 서정리 350번지 주소와 전쟁 때 두고 온 어머니와 돌쟁이 딸을 한시도 잊지 못하는 실향민, 기력 없는 몸이 이끄는 대로 그저 누워 있었다면 쓰라린 회한의 파도에 마음이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이즈음 그림책 특화 문화도시 강원 원주를 비롯 경남 진주 · 제주 · 충남 부여 송정리 등 지역 곳곳의 그림책 예술 문화 단체들이 지역 어르신을 대상으로 ‘인생 그림책 만들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글쓰기도 어렵고 그림 그리기도 서툴지만, ‘글’ ‘그림’ 양손으로 기억을 길어 올리는 과정과 그 결과물이 얼마나 귀하고 유익한지 실감하게 된다. 그림책은 예술적 결과물이며 그에 깃든 삶을 보여주지만, 누구든 스스로의 인생을 담고 갈무리하기에 좋은 그릇이기도 하다.

이상희 시인, 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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