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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바탄 죽음의 행진(4.3)

입력
2018.04.03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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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 4월, 일제 포로가 된 필리핀 주둔 미 극동지상군의 강제 이송작업인 '바탄 죽음의 행진'이 있었다. 일본군 지휘관 혼마 마사하루가 종전 후인 45년 오늘 처형됐다.
42년 4월, 일제 포로가 된 필리핀 주둔 미 극동지상군의 강제 이송작업인 '바탄 죽음의 행진'이 있었다. 일본군 지휘관 혼마 마사하루가 종전 후인 45년 오늘 처형됐다.

원폭 투하(45년 8월 6일) 71년 만인 2016년 5월,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원공원을 찾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에게는 특별한 동행자가 있었다. 2차 대전 ‘바탄ㆍ코레기도르 방어 미군 추모회’ 소속 재향군인 대니얼 크롤리(당시 94세)였다. 크롤리는 미 육군 항공대 사병으로 참전, 1942년 필리핀 바탄(Bataan) 반도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된 뒤 44년 일본으로 이송돼 도쿄 북동부 히타치 구리광산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강제 노역한 생존자. 그는 현직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추도가 원폭 사죄가 아니라 전쟁 희생 일반에 대한 회한임을 대변하는 상징적 존재였다. 바탄 반도는 하와이 진주만과 함께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의 희생과 일본의 만행을 환기시키는 장소다.

태평양 전진기지 공략에 나선 일본은 약 넉 달 만인 41년 12월 필리핀 마닐라를 점령했다. 보급선을 차단 당해 고전하던 미 극동지상군(필리핀과의 연합군)은 42년 4월 9일, 마지막 저항 거점이던 남중국해 마닐라만의 바탄 반도에서 항복, 7만6,000명이 포로가 됐다. 제국군대는 대대적 포로 이송작업을 시작했다. 해안기지 마리벨레스(Mariveles)에서 내륙 카파스(Capas)에 이르는 120㎞ 강제행진. 포로에게는 식량과 물을 배급하지 않았고, 낙오자는 총검으로 살해했다. 오도널 수용소(Ononnell Camp)에 도착한 인원은 약 5만 4,000명. 닷새 행진 중 최소 1만 명이 굶주림과 탈진, 말라리아 감염으로 숨졌고, 일부는 밀림으로 도주했다.

필리핀 침공을 주도한 일본 제14군 사령관이 혼마 마사하루(本間雅晴) 중장이었다. 미군은 45년 1월 필리핀을 탈환했고, 전범 재판을 거쳐 이듬해 4월 3일 마사하루를 통상적 처형법인 교수형 대신 총살했다. 재판 과정에서 그는 포로 가혹행위를 명령한 사실을 부인했다. 육군대학을 나와 영국대사관 주재 무관 등을 지낸 그는 제국군 고위지휘관으로선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편으로 알려졌고, 군 수뇌부와의 갈등으로 전쟁이 한창이던 43년 8월 예편했다. ‘바탄 죽음의 행진’은 한 호전적 참모(쓰지 마사노부)의 독단적 명령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고, 당시의 급박한 전황과 전투 직후의 감정이 낳은 참극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건 미국에겐 참전ㆍ독전(督戰)의 좋은 소재가 됐다. 사실 전쟁 자체가 죽음의 행진이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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