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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이기적인 일상과 이타적인 광장

입력
2017.03.3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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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의 시위가 이처럼 평화로울 수가 있었을까.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시민이 박근혜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광장에 모였지만, 광장은 평화로운 축제 같았다. 억압기구를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인 국가의 최고 권력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위험천만한 집회가 이토록 평화로웠다는 것은 역설에 가깝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광장에 모인 모두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동지였고 친구였다. 바람에 꺼진 촛불의 불씨를 나누며 시민들은 서로가 하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뜨거워졌으리라. 광장의 촛불이 꺼진 후 광화문의 뒷골목에 삼삼오오 모여든 시민들은 처음 본 낯선 이에게조차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환대했다. 사소한 불편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거의 모든 것에 관대했고, 흥에 겨워 서로의 팔과 어깨를 감싸며 축배를 들었다. 광장의 시민들은 평화로웠지만 단호했고, 서로를 알지 못했지만 연대는 강고했다. 결국, 불의한 정권은 시민들의 강고한 연대가 만든 평화로운 축제를 이길 수 없었다. 외신은 다투어 평화로운 집회와 민주주의의 승리에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광장의 시민은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이웃에게 사소한 일로 광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고, 조그만 손해에도 불같이 화를 내는, 짧은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고성을 지르는 우리가 동네에서, 일상에서 보아왔던 그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두 세계에 사는 것일까. 일상에서 드러나는 끝없는 이기심과 광장에서 활짝 핀 이타심의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몇 차례 북유럽 국가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옆에 있던 동료가 교육청 관계자에게 북유럽 청년들을 괴롭히는 고민이 있는지를 물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 교육청 관계자는 당황하며 그런 고민은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이내 말을 바꿔 고민이 있다고 대답했다. 북유럽 청년들의 고민은 세계평화와 환경오염이라고 했다. 당황스러운 답변이었다. 강요된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주변은 물론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되돌아보지 못하는 한국 청년의 모습이 겹치면서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한국인은 이기적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고, 복지국가와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알려진 북유럽 사람들은 이타적 유전자를 타고난 것일까. 우리는 이 두 사회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유전적 이유가 아니라면 대답은 명확하다. 한국 사회가 한국인을 자기밖에 모르는, 주변과 사회 정의에 무관심한 사람들로 만든 것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한국 사회에서 다른 사람을 돌보고, 민주주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이타적인 삶은 자살행위이다. 부모의 소득과 지위가 자녀의 학벌과 지위로 이어지는 대물림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의 연대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일 뿐이다. 국가가 부정부패와 불공정의 온상이 된 지 오래이고, 시민의 안위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사회에서 이타심은 동화책에나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어쩌면 지난 몇 개월 동안 광장에서 펼쳐진 이타적 행위는 한여름 밤의 꿈이었고, 30년 만에 한 번씩 터져 나오는 예외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꿈에서 깨어 일상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다시 강요된 이기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2017년 대통령 선거가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1987년 이후 30년 간 미루어온 변화를 이제는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2017년은 광장에서 확인된 한국인의 이타심이 예외가 아닌 일상이 되는 시작이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광장의 시민이 만든 새 정부가 또다시 광장의 시민과 일하는 사람들의 적이 되는 것이다. 시민은 다시 30년을 더 기다릴 수 없다.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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