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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래를 불러 줘요, 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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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래를 불러 줘요, 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노래를...

입력
2014.10.1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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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담당 기자라고 말하면 흔히 듣는 질문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뭔가요?”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딱히 할 이야기가 없어서 던지는 질문인 경우가 많다. ‘내 인생의 영화’로 꼽을 만한 작품이 몇 편 있긴 하지만 목록을 일일이 열거하는 부질없는 짓은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아!’가 아니라 ‘아…’로 시작하는 표정이 돌아오기 일쑤고 ‘괜히 물어봤어’ 하는 느낌으로 대화가 흐지부지 끝나는 경우가 많아서다.

목록 어딘가에 있는 영화 중 한 편이 ‘카사블랑카’(1942)다. 영화를 본 지 꽤 오래돼 기억이 흐릿하지만 20대 시절엔 가장 많이 본 영화였다. 흑백영화에 인위적으로 색을 입히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려줬던 그 영화. 젊었을 때만 해도 이 작품이 얼마나 위대한지 쓸데없이 열을 올리며 말하곤 했지만 언제부터인지 토를 달면 달수록 이 영화의 비밀스런 마력이 지닌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 이젠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얼마 전 영화 ‘비긴 어게인’을 보면서 ‘카사블랑카’를 다시 떠올렸다. 술주정뱅이 프로듀서 마크 러팔로와 아마추어 가수 키이라 나이틀리가 뉴욕 유니언 스퀘어에 앉아 각자의 휴대전화에 담긴 노래를 듣는 장면이었다. 나이틀리가 “공개하기 창피한 음악이 많다”고 말한 뒤 나온 노래가 ‘카사블랑카’의 주제곡 ‘애스 타임 고스 바이’다. 간결하면서도 가슴에 깊은 생채기를 내는 곡 자체가 명곡이기도 하지만 두 주인공의 취향과 미래를 얼핏 보여주는 것 같아 더욱 좋았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것만은 기억해요 / 키스는 여전히 키스이고 / 한숨은 단지 한숨일 뿐 / 시간이 지나도 / 본질은 바뀌지 않아요” 화자가 이야기하는 본질은 이런 거다. “달빛과 사랑 노래가 /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될 순 없어 / 정열로 가득한 마음 / 질투와 증오도 / 여자는 남자를 필요로 하고 / 남자도 짝이 있어야 하지 / 그건 아무도 부정할 수 없어”

영화 ‘카사블랑카’는 노래의 끝부분에 나오는 가사처럼 ‘오래되고 똑같은 사랑 이야기’다. 사랑보다 더 대단한 뭔가를 위해 사랑을 희생해야 했던 남녀의 이야기.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술집을 경영하는 미국인 릭(험프리 보가트)은 반 나치 활동을 하다 쫓기게 된 라즐로와 일사(잉그리드 버그만) 부부의 도피를 돕는다. 이 영화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짐작할 수 있듯, 과거 릭과 일사는 사랑하는 사이였다. 보가트와 버그만은 역사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연기를 펼쳐 보이지만 극중 두 남녀의 사랑은 끝내 이뤄지지 않는다.

‘카사블랑카’는 뜯어 보면 클리셰로 가득한 영화다. 일사가 흑인 피아니스트 샘(둘리 윌슨)에게 ‘그 노래’를 부탁하는 장면도 특별할 게 없는 뻔한 설정이다. 그런데도 이 장면이 오래도록 회자되는 건 영화의 애틋한 정서를 진액으로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샘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하는 일사와 멀리서 다가와 “그 노래 연주하지 말랬지”라고 다그치는 릭의 강렬한 눈빛 교환. 때론 이렇게 정통으로 진부한 장면이 더욱 감동적인 법이다.

‘애스 타임 고스 바이’는 영화 속에서 릭과 일사의 관계를 끊임 없이 상기시키는 모티프로 기능한다. 재미있게도 영화 속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이 노래를 부른 둘리 윌슨은 원래 드러머여서 피아노를 치는 시늉만 했다고 한다. 영화음악 감독 맥스 스타이너가 이 노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다른 곡으로 바꾸려고 했지만 다음 영화 준비로 머리를 짧게 자른 버그만 때문에 재촬영이 불가능해 그냥 쓰게 됐다는 일화도 있다. 개봉 전만 해도 이 영화는 대단한 화제작이 아니었지만 결국 불후의 명작이 됐다. 뒤늦게 생각해 보니 ‘카사블랑카’를 그토록 사랑했던 건 두 배우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결말, 무심한 듯 군더더기 없는 연출 같은 외적 요소뿐 아니라 그 모든 우연과 허점이 절묘하게 만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 영화 ‘카사블랑카’ 중 'As Time Goes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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