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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진화, 이젠 강아지를 강아지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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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진화, 이젠 강아지를 강아지라 부른다

입력
2016.04.15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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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수많은 강아지를 강아지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뭔가. 인공지능은 '홍길동의 걸림돌'를 넘어서야 했다. 동아시아 제공
저 수많은 강아지를 강아지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뭔가. 인공지능은 '홍길동의 걸림돌'를 넘어서야 했다. 동아시아 제공

김대식의 인간 VS 기계-인공지능이란 무엇인가

김대식 지음

동아시아 발행ㆍ352쪽ㆍ1만8,000원

‘개’와 ‘고양이’ 구분 못하던 AI

수많은 사례 판정 경험 학습하는

딥러닝 기술 통해 업그레이드

인간 뇌보다 압도적 깊이는 물론

생각 폭 넓히며 가능성 무한대로

“인류 멸종 부를 것” 비관론까지

우리는 어떻게 강아지를 강아지라 부를까. 생각해보면 답이 딱히 마땅찮다. 네 발? 털? 귀? 꼬리? 짖는 소리? 홍길동의 마음이 이해될 법도 하다.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는 다음과 같은 부등식으로 표현했다. ‘우주의 해상도>인식의 해상도>언어의 해상도.’ 이 세계를 우리가 모두 다 보고 느낄 수 없다. 더구나 보고 느끼는 것을 모두 표현해낼 수 있는 언어라는 것도 없다.

그래서 ‘김대식의 인간 vs 기계’는 ‘인간에게 쉬운 건 기계에게 어렵고, 기계에서 쉬운 건 인간에게 어렵다’는 ‘모라벡의 역설’에서 시작된다. 인공지능(AI)이라는 말은 1956년 미국의 수학자, 과학자들의 모임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때만 해도 낙관적이었다. 2차대전 이후 컴퓨터 기술이 나날이 발달하고 있었으니 뭔가 이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들은 생각했다. AI를 확인해볼 수 있는, 사람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게 뭘까.

해서 고른 게 수학과 체스였다. 제일 똑똑하다는 그들이 늘상 다루는 문제가 수학이었고, 쉬는 시간에 놀이 삼아 두는 게 체스였으니. 수학은 이미 극복했고, 체스는 1990년대에 이겼고, 그보다 어렵다던 바둑은 올해 해결됐다. 그런데 지금 우리 주변에 AI는 없다. 왜 그럴까. 인간에게 어려운 계산은 척척 해내지만, 인간에게 가장 쉬운 강아지 쓰다듬어주기는 어려워서다. 아니 그냥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강아지인지조차도 알아보지 못한다.

시각정보를 처리하는 기계와 뇌의 시스템. 척 보고 안다는 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동아시아 제공
시각정보를 처리하는 기계와 뇌의 시스템. 척 보고 안다는 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동아시아 제공

‘김대식의 인간 vs 기계’는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하는 책이다. 인간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 그리고 그 뇌의 작동 방식을 따라잡기 위한 과학자들의 연구를 가장 쉬운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 범위도 고대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ㆍ헤라클레이토스에서 시작해 라이프니츠, 버틀란드 러셀, 존 폰 노이만, 비트겐슈타인, 앨런 튜링 등을 거쳐 오늘날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에다 구글과 페이스북으로까지 연결되어 있으니 광범위하다.

폰 노이만부터 시작하자면 이렇다. 그는 1958년에 쓴 ‘컴퓨터와 뇌’라는 책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사실 정말 이해하고 싶었던 것은 뇌였다. 뇌를 이해하기 위해 컴퓨터 구조를 만들고 설계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실수한 것 같다.” 무엇이 실수였던가. 바로 계산하는 방과 기억하는 방을 분리시키는, 그러니까 지금 모든 컴퓨터들이 쓰는 CPU(중앙처리장치)와 메모리를 분리해두는 방식을 말한다. 인간은 뇌를 ‘깊게보다는 넓게’ 쓰는 쪽으로 발전했고, 따라서 뇌는 병렬연산을 할 것이라는 게 폰 노이만의 추론이었다.

폰 노이만의 후회를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표현으로 바꾸자면, 뇌는 일일이 계산하느니 대충 때려 맞추는 쪽을 선호한다. 진화를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저 숲이 부스럭거릴 때 옆집 아이인지, 앞집 총각인지, 뒷집 고양이인지, 아랫집 강아지인지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끄집어낸 뒤 잎사귀가 흔들리는 방향, 소리의 강도, 나뭇가지의 휘는 정도, 땅을 울리는 진동수, 인근에서 풍기는 냄새 등 모든 정보를 냉철하게 비교 분석하는 쪽보다는 대충 호랑이겠다 싶으면 냅다 튀는 쪽이 살아남을 테니까.

해서 인간의 뇌는 우주의 정보를, 인식의 정보를 모두 다 저장하고 그 때 그 때 꺼내 쓰는 쪽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대신 어떤 낌새, 기미 등 큰 줄거리만 요약 정리한다. 그것도 그냥 정리하는 게 아니라 “예전부터 알았던 이야기, 내가 들은 이야기, 남들이 나한테 보여주는 이야기, 그런 것들을 합쳐서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어서 기억”하게 된다. 다시 말해 “기억한다는 것은 어디에다 정보를 저장했다가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매번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10의 11승개나 되는 신경세포가 10의 15승개 만큼의 시냅스로 연결되어 있는 뇌가 하는 일은 바로 이거다.

강아지에 적용하자면 이렇다. 인간의 뇌는 몇 마리의 강아지만 보면 새로운 강아지가 나타나도 그게 강아지인 줄 바로 안다. 뇌는 대충 때려 맞추니까. 그러나 기계는 그게 안 된다. 같은 강아지라도 털 길이가 달라지거나, 가만히 앉아 있거나, 뛰거나, 구를 때마다 다른 동물이나 사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기계에게 저기 있는 귀여운 동물이 강아지라는 것을 알려주려면 사례를 계속 줘야 한다. 문제는 이 지구상에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감안한 사례를 준다는 것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걸 돌파해낸 게 딥러닝이다. 기계 나름대로 판단해보고 내놓은 답에 대해 O, X 판정만 해준다. 그렇게 스스로 계속 판정해본 경험을 학습하는 것이다. 이 학습법의 원리는 2012년쯤 수학적으로 다 풀렸고, 이후 딥러닝 기술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온다. 사람 얼굴을 인식하고 개와 고양이를 구분하는 등 기계도 인간 뇌처럼 넓게 생각하는 방식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후는 보는 대로 파죽지세다. 알파고는 인간을 이겼다. 동화책을 입력해주면 새 동화책을 쓴다. 미국 시트콤 ‘프렌즈’, 만화 ‘심슨’을 입력해서 새 대본을 받아내는 것도 가능하다. ‘딥 드림’을 쓰면 똑같은 사진을 고흐 화풍으로, 칸딘스키 화풍으로, 뭉크 화풍으로, 피카소 화풍으로 다시 그려낼 수 있다. 얼마나 풍부하고 많은 사례를 줄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그건 열심히 페북질 하는 당신이, 우리가, 전세계가 주는 거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대체 무엇으로 공부할까. 그건 당신의 '페북질'같은 빅데이터다. 동아시아 제공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대체 무엇으로 공부할까. 그건 당신의 '페북질'같은 빅데이터다. 동아시아 제공

다시 문제는 폰 노이만으로 되돌아간다. 인간의 뇌는 얕은 대신 넓다. 그런데 기계는 깊은 대신 좁았다. 기계는 깊은 만큼 인간이 어려워하는 일을 다 해결했다. 인간의 뇌 신경망은 10~15층 수준으로 구성됐는데 알파고는 48층, 다른 딥러닝 기계들은 150층까지도 구축되어 있다.

그런데 이제 기계가 그 좁았던 폭을 넓히기 시작했다. 기억하자. 기계는 깊이에서 인간보다 훨씬 압도적이다. 계속 넓어지다 보면 이제 어느 순간 인간의 머리로선 도저히 상상도 못할 논리와 판단을 전개할 가능성이 생기기 시작한다. 뇌를 흉내 내서 딥러닝을 만들었더니 이제 인간의 뇌가 딥러닝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AI가 결국 인류 멸종으로 치달으리라는 스티븐 호킹, 엘론 머스크의 호소는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반론도 있다. 그런데 이 반론이라는 건 더 불쾌하다. 미국 카네기멜론대 앤드루 무어는 되묻는다. “인류 멸망이 왜 나쁜가.” 인간이니까 우리 인간끼리 하는 말 말고 말이다. 존재증명이란 늘 난감한 문제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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