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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할 곳은 많지만, 블랙기업이 두려운 日 청년들

입력
2016.01.1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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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한중일 청년 리포트 (1) 취업&창업-일본

취업난? 잘 모르겠는데…

메이지대 국제일본학부 4학년인 카미야 아키노리(神谷 彰典ㆍ22)는 이미 8월에 일본의 원조 재벌 기업인 미쓰비시 제강에 합격했다. 15군데 정도 면접을 봤다는 카미야는 “취업난이라는 얘기는 잘 못 들어봤다”며 “주변에 취업이 어렵다는 친구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카미야 아키노리는 "일본의 니트 청년들은 일 할 곳이 없어서 못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일을 하지 않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카미야 아키노리는 "일본의 니트 청년들은 일 할 곳이 없어서 못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일을 하지 않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일본 후생노동성이 지난해 초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 대졸 취업률은 96.7%다. 국내에도 관련 기사들이 줄줄이 보도됐다. 통계에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 도쿄(東京)에서 만난 청년들 역시 “취업이 절대 어렵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2011년에 일본에 건너온 한국인 유학생 이아인(24)씨는 지난해 3월 타쿠쇼쿠대 국제학부를 졸업하고 귀국 대신 일본 현지 취업을 선택했다. 이씨는 “한국 친구들 얘길 들어보면 ‘100군데 넣어도 안 된다’ ‘근무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는 얘기들 뿐”이라며 “일본에선 대기업만 고집하지 않으면 취업이 어렵진 않다”고 말했다. 또 “대학에서 함께 밴드 활동을 한 친구들은 수업도 자주 빠지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는데 오히려 남들보다 먼저 합격했다”며 “일본에선 저런 친구들도 취직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일본엔 이력서에 학점을 아예 쓰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스펙이 문제가 아니야

쇼우지 유리가 웨딩업체에 제출했던 이력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주영기자
쇼우지 유리가 웨딩업체에 제출했던 이력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주영기자

타쿠쇼쿠대 국제학부 4학년인 쇼우지 유리(庄司 結里ㆍ22)가 보여준 이력서는 독특했다. 웨딩 업체에 냈던 이력서는 손글씨로 작성돼 있었고, 심지어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오려 붙이기까지 했다. 회사에서 요구한 내용은 ‘자신의 개성을 살려 웨딩 플랜을 짜보라’는 것. 쇼우지는 “친한 친구들의 특징을 살려 드레스와 메이크업, 결혼식 콘셉트는 물론 신혼여행까지 맞춤형으로 제공하는 아이디어를 표현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취업의 당락을 좌우하는 건 개성과 창의력이다. 쇼우지는 “면접 질문 중에 ‘백지를 주고 자신을 표현해보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추상적인 과제를 어떻게 풀어내야 할 지 캄캄했다”고 말했다. 도쿄로 면접을 보러 온 아오모리(?森)현 히로사키대 4학년 사카 아이코(坂 愛子ㆍ22)도 “상사 명령으로 화성에 가면 뭘 가지고 갈 건가, 라는 문제를 보고 당황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쇼우지 유리(왼쪽 맨 앞)가 대학교 농구부로 활동하던 당시의 모습. 쇼우지 유리 제공
쇼우지 유리(왼쪽 맨 앞)가 대학교 농구부로 활동하던 당시의 모습. 쇼우지 유리 제공

취업에 정도(正道)가 없다 보니, 학생들은 취직준비보다 대학 생활을 즐기는 데 시간을 투자했다. 카미야와 쇼우지는 둘 다 농구부 활동을 오래 했다. 쇼우지는 7년간 농구부 활동을 하며 주장까지 역임했다. 카미야는 “평소엔 사회에 나가면 할 수 없는, 학생 때 즐길 수 있는 거면 뭐든 열심히 하려고 했다”며 “취업만을 위해 따로 노력한 건 없다”고 말했다.

또 한가지 일본 대학생들을 옭아매는 것은 ‘신졸일괄채용’ 시스템이다. 기업에서 대학교 3, 4학년을 채용하는 방식인데, 취업 재수가 극히 제한적인 것이 특징이다. 사카는 “신졸채용 때 취업하지 못하면 원하는 회사에 들어가기 어렵다”며 “이번에 꼭 취직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불안하다”고 말했다.

면접 보는 날 도쿄에 온 지방 대학생 사카 아이코가 한 취업 카페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나오고 있다. 김주영기자
면접 보는 날 도쿄에 온 지방 대학생 사카 아이코가 한 취업 카페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나오고 있다. 김주영기자

비정규직도 괜찮아, 블랙기업만 아니면…

하지만 일본 대학생들이 걱정하는 건 취업 자체가 아니라 취업 이후의 삶이었다. 일본에선 근로자에게 가혹한 노동을 강요하는 기업이라는 뜻의 ‘블랙기업’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2009년엔 ‘블랙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이제 난 한계인지도 몰라’라는 제목의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영화 ‘블랙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이제 난 한계인지도 몰라’의 포스터.
영화 ‘블랙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이제 난 한계인지도 몰라’의 포스터.

쇼우지는 취업 활동 중에 블랙기업에 대해 책과 인터넷으로 조사하는 데 가장 신경을 많이 썼다. 한 호텔 회사에 합격한 뒤 제일 먼저 한 일도 회사 평판 정보 사이트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이케부쿠로(池袋)에서 만난 나카 요스케(仲 陽介ㆍ26)가 니트(NEETㆍ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길을 선택한 것도 오래 일하고 적게 버는 친구들의 삶을 따라 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속한 ‘니트 주식회사’라는 곳은 니트들이 모여 프로젝트 단위의 사업을 진행하는 회사인데, 나카는 “회사에 속한 사람들 중엔 직장을 다니다가 월급이 적거나 야근이 잦은 노동 환경을 못 견디고 다음 직장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블랙기업이 아니라면, 비정규직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불평등한 처우나 사회적 차별은 없다고 했다. 이아인씨는 졸업 후 입사한 회사가 합병되면서 계약이 해지되는 바람에 새 직장을 찾고 있다. 이씨는 “어제 면접 본 곳은 계약직인데, 정규직과 연봉이나 인센티브에서 차이가 없다”며 “계약 기간이 끝나면 커리어를 쌓을 수 있도록 100만엔(약 963만원)을 지원해 주는 제도도 있다”고 말했다.

이아인씨는 “일본에선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기 위해 일부러 비정규직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며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무조건 안 좋은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주영기자
이아인씨는 “일본에선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기 위해 일부러 비정규직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며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무조건 안 좋은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주영기자

카미야와 쇼우지는 한국의 취업 상황을 듣고 “한국은 대기업에 취직해야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고, 주변 시선도 많이 의식하는 것 같다”며 “일본에선 중소기업 들어 갔다고 인생에 문제가 생기지 않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니 주변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없다”고 짠 듯이 똑 같은 얘길 했다.

혹시 일본 청년들이 저임금 노동의 타성에 젖어 한 말은 아닐까? 쇼우지가 취업한 회사는 연봉 250만엔(2,445만원ㆍ급료가 좋은 편은 아님), 이아인씨는 인센티브 포함 연봉 280만엔(2,738만원ㆍ직원이 9명인 작은 회사)이었다. 도쿄는 교통비와 집값이 비싸지만, 교통비는 대부분의 회사가 지원해주니 집값을 쉐어하우스로 절약한다면 서울보다 결코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도쿄에서 일하는 한 한국인은 “이것저것 따져보면 중소기업에 취업하더라도 서울보다 삶의 질이 떨어지는 건 결코 아니다”라고 말했다.

도쿄ㆍ요코하마=김경준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사진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이 기사는 한국일보 특별기획 ‘한중일 청년 리포트’의 일부입니다. ▦취업&창업 ▦주거 ▦결혼 ▦관계 등 총 네 가지 주제에 따라 각각 한국, 중국, 일본 청년들의 사례를 다루어 총 12편의 기사가 연재됩니다. 한국일보닷컴에서 전체 기사를 디지털 인터랙티브 형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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