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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360˚] 난민 이흑산, 한국에서 진짜 복서로 거듭나다

입력
2017.12.0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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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 바 비엥(tout va bien)”

태극마크를 달고 치르는 첫 국제전을 나흘 앞둔 지난달 21일, 이흑산(34ㆍ본명 압둘레이 아싼)은 인터뷰 중 끊임없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모든 것이 다 잘될 겁니다’ 라는 이 말을 주문처럼 읊조린 덕일까. 지난달 25일 서울 강북구 신일고 체육관에서 열린 복싱매니지먼트코리아 주관 웰터급(66.68kg 이하) 한일전 경기에서 이흑산은 일본의 바바 가즈히로(25)에게 KO승을 거뒀다.

카메룬 군대에서 폭력을 견디지 못해 한국으로 망명한지 2년. 그간 이흑산은 ‘검은 산’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얻었다. 나아가 바늘구멍 뚫기만큼 어려운 난민자격을 얻고 한국 권투(복싱)챔피언 자리도 얻었다. 그의 삶은 정말 잘 되고 있는 중이다.

이흑산 선수가 지난달 21일 춘천 아트복싱체육관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설이ㆍ김창선 PD.
이흑산 선수가 지난달 21일 춘천 아트복싱체육관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설이ㆍ김창선 PD.

탈영병 압둘레이 아싼

“사람들이 나라를 포기하고 망명할 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1994년부터 지난달까지 약 24년간 국내 난민신청자는 3만82명이다. 그들 모두에게 각자의 사연이 있다. 누구는 전쟁을 피해, 누구는 종교적 박해를 피해 한국에 왔다. 성적 지향으로 망명한 경우도 있다. 난민 이흑산에게는 군대 내 폭력과 가난이 망명 이유였다.

그는 아프리카 카메룬의 수도 야운데에서 태어났다. 부모 없이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가난은 늘 함께였다. 어릴 적부터 권투 경기만 보면 열정이 솟았고, 그 느낌을 따라 16세때부터 킥복싱과 권투를 배웠다. 스무살이 넘어 먹고 살 길을 고민하던 중 군대가 직업군인 겸 권투선수를 구한다는 소리를 듣고 입대했다.

카메룬은 35년째 폴 비야 대통령의 독재가 이어지고 있다. 국제엠네스티는 2016,2017년 카메룬 인권 동향 보고서에서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고 군대 내 공정한 재판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런 현실에서 군 입대한 이흑산의 삶이 평탄할 리 없었다. 그는 “정식 군인으로도, 정식 선수로도 대접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군사훈련을 받지 않았고 월급도 받지 못했다. 그는 오직 군인 국제대회를 위한 존재였다. 하지만 준비는 철저히 선수 본인의 몫이었다. 연습을 하다 부상을 당해도 자비로 치료를 해야 했다. 문제는 경제 사정이 병원비는 커녕 생계를 이어가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대전료가 유일한 수입이었지만 그마저도 절반은 군에서 가져갔다. 결국 시장에서 장사를 해가며 생계를 해결했다.

2015년 경북 문경 세계군인대회 당시 이흑산(가운데)과 카메룬군 선수단. 이흑산 선수 인스타그램.
2015년 경북 문경 세계군인대회 당시 이흑산(가운데)과 카메룬군 선수단. 이흑산 선수 인스타그램.

열악한 군 생활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이흑산은 2008년 자국에서 열린 민간 복싱대회에 출전했다. 군은 허락하지 않았지만 몰래 경기를 치렀다. 대가는 혹독했다. 그는 감옥으로 끌려가 두 달간 채찍질을 당했다.

2015년 10월, 이흑산은 카메룬군 대표로 문경에서 열린 세계군인체육대회에 참석했다. 이렇게 먼 나라를 방문한 것도 처음이었다. 대회 다섯째 날, 그는 선수단 버스에서 내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그저 힘든 삶을 벗어나고 싶었다.

복싱, 난민 아싼의 생존비결

“일부러 한국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주어진 기회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카메룬에 있을 때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을 생각해보지도, 꿈꿔보지도 않았다. 사실 한국에 대해 잘 몰랐다. 남북이 분단된 나라라는 정도만 알았을 뿐이다. 그는 한국을 고른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택한 것이다.

불법체류자가 된 그의 삶은 쉽지 않았다. 탈영하자마자 난민신청을 했으나 인정받지 못했다. 예상한 결과였다. 지난 24년간 한국에서 난민인정을 받은 경우는 신청자의 3%(767명)에 불과하다. 군대 내 고문을 체험한 그는 ‘본국 송환 시 박해 받을 것이라는 공포의 근거가 충분치 않다’는 법무부 판단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힘든 상황에서도 권투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행운이었다. 난민신청결과를 기다리며 천안의 한 체육관에서 운동을 한 그는 마음에 맞는 친구들을 만났다. 이흑산이 지난달 25일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고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고마워한 길윤식(36)씨 등 몇몇 친구들이 그를 계속 도왔다. 권투를 계속해 한국 챔피언이 된다면 난민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도 해줬다. 이에 이흑산은 전 한국 미들급 챔피언이었던 춘천 아트복싱 이경훈(53) 관장에게 권투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고 연락했다. 열정으로 시작한 권투는 이제 생존의 문제가 됐다.

키 180㎝, 리치(양팔을 벌린 길이) 187㎝의 훌륭한 신체조건에 강한 체력까지 갖춘 이흑산의 실력은 나날이 성장했다. 제대로 된 훈련은 이때 처음 받았다. 그는 “카메룬에서는 의지만 갖고 연습했을 뿐 기술을 가르쳐줄 사람도, 기구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4월 미들급 유망주인 양현민 선수를 이겼다. 한 달 후에 전 한국 미들급 챔피언 이규원 선수와 한국챔피언 타이틀전을 벌여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뒀다.

이를 계기로 그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다. 올해 7월 법무부는 그의 난민 지위를 정식으로 인정했다.

이흑산(왼쪽) 선수가 지난달 25일 서울 강북구 신일고체육관에서 열린 복싱매니지먼트 주관 웰터급 한일전 경기에서 일본의 바바 가즈히로(오른쪽) 선수와 대결하고 있다. 한설이ㆍ김창선 PD.
이흑산(왼쪽) 선수가 지난달 25일 서울 강북구 신일고체육관에서 열린 복싱매니지먼트 주관 웰터급 한일전 경기에서 일본의 바바 가즈히로(오른쪽) 선수와 대결하고 있다. 한설이ㆍ김창선 PD.

난민인정을 받았지만 삶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추방당하지 않고 계속 체류할 수 있을 뿐, 여전히 그는 단칸방에서 생계를 걱정하며 삶을 이어가고 있다. 고국에 두고 온 할머니, 병 치료를 받지 못하고 지난해 사망한 8세의 어린 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흘러갈 것”이라 믿는다. 미래는 불안했지만 어느덧 ‘카메룬-코리안’으로서 국제전도 치렀다. 한국 사람들이 그에게 보내준 응원은 부담이자 용기가 됐다.

“나이가 많은 편이기에 확신할 순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가능하면 세계적 수준이 될 때까지 권투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이흑산은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고 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한설이 PD ssolly@hankookilbo.com

김창선 PD changsun9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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