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저녁 판문점 남측 평화의집.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이 기어이 목에 핏대(그의 별명이기도 하다)를 세웠다. 남측이 회담 중의 비핵화 논의 사실을 누설한 데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내내 입가에 머물던 웃음기도 가셨다. 2년여 만의 남북회담은 이때까지 순조로웠다.
뜻밖의 몽니였지만 우리 대표단 수석인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동요하지 않았다. 표정 없이 들었다. 되레 옅은 미소가 어렸다. 정말 속내를 알 수 없는 돌부처 같았다. 대답은 정곡이었다. “언론의 관심은 곧 국민의 관심이다.” 이번엔 리 위원장이 조 장관을 오래 응시했다.
얼마 만의 회담장인가. 10년 전 떠밀리듯 통일부를 떠날 때 베테랑은 이런 날이 올지 몰랐을 테다. 보수 정권 기간 대화가 말라붙었던 터라 통일부 직원 통틀어 여전히 가장 회담 경험이 풍부한 이가 조 장관이다. 남북 경제협력 회담을 도맡았다. 개성공단의 산파도 그다.
덕분인지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비서관으로 발탁됐고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에 배석해 회의록을 작성했다. 회담 성사 추진에도 깊이 간여했다. 하지만 그 탓인지 2012년 말 불거진 정상회담 회의록 폐기(이른바 사초 실종) 의혹에 말려 고초를 겪었다.
공교로운 인연이다. 50년 전 조 장관은 빙속 선수였다. 북한이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하느냐가 핵심 의제던 이번 회담에서 그의 유년 이력이 서먹한 분위기를 눅이는 데 기여했다.
조각 당시 조 장관의 등용은 의외인 인사로 꼽혔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퇴직 뒤 종교 활동에 전념했다. 대선 때 별다른 역할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대통령 절대 신임을 받는 그는 어깨가 가장 무거운 각료다. 첫발은 뗐지만 길이 멀다. 기회는 위기기도 하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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