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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산업혁명 이전에 사회혁신을

입력
2017.08.15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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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청송으로 학회 워크숍을 갔다. 그곳엔 정유재란 때 일본 사쓰마로 납치된 조선 도공 가문 심수관의 매혹적인 도자기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15대 째 내려오는 심수관의 기술과 예술의 경지는 조선 백자의 수준을 한결 뛰어넘는 것이었다. 근세 유럽과 교류하며 흡수한 듯한 문양의 향로는 정교하면서도 대담했다. 전체를 도자기로 형상화한 돛단배는 기존 상식을 넘어 먼 미래로 항해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기가 막힌 예술의 극치를 보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일본으로 건너가 15대에 걸쳐 예술혼을 꽃피운 그들이, 조선에 남아 있었으면 저런 경지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 우리의 사회문화적 맥락들이 뇌리를 스쳤다.

여러 가지 일이 회상된다. 사업을 준비하면서 처음 맡았던 컨설팅 프로젝트가 모 전자기업의 혁신 방안에 대한 것이었다. 피처폰에서 스마트폰으로 시장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누적된 조직의 문제가 불거져 나오던 차였다. 우리는 중간보고에서 그간 CEO의 리더십 방향에 문제가 있었고, 조직을 대담하게 개편하여 하나의 플래그십 모델에 승부를 걸면서 브랜드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는 조언을 했다. 당시 중간 실무자 간부들로부터 욕설만 없는 거센 항의를 받았다. 결국 CEO에게 직접 대면 보고를 하게 되었는데, 보고 당일 CEO는 사표를 냈다. 그간 시장과 조직의 현황에 대해 바른 말을 하는 실무자가 단 한 명도 없었나 싶었다. 어떤 글로벌 컨설팅 회사가 같은 클라이언트에게 잘못된 조언을 해서 시장 패러다임 변화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말이 회자되었지만, 당시의 내 느낌은 사뭇 달랐다. 아마도 문제의 에이전시는 오랜 기간 업무를 해 오면서 조직 내 실무자가 원하는 답을 내도록 길들여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업 초창기에 정부출연연구소에서 리서치 프로젝트를 발주했다. 25개 분야의 산업 동향을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전망하는 업무였다. 문제는 비용과 기간이었다. 마침 유럽의 동료 연구자가 비슷한 일을 유럽연합 사무국의 의뢰로 진행하고 있었다. 1개 산업 분야에 대한 분석에 30만 유로의 예산과 5명의 석박사급 연구자, 3년의 기간이 투자되었다. 반면 한국에서 일을 맡은 우리는 무려 25개 분야의 보고서를 실제론 3개월 내에 만들어야만 했고, 비용은 유럽의 1개 분야에도 못 미쳤다.

씁쓸한 기억으로 남은 그 두 가지 일은 한국 사회의 업무 방식을 압축적으로 대변하는 사건이었다. 외부 전문가의 객관성과 통찰력을 인정하지 않기에, 한국에선 많은 컨설팅들이 ‘답정너’가 되기 쉽다. 결국 남는 것은 유명한 외국 업체에 의뢰했다는 실무자의 면피성 보고이거나, 나이 든 오너의 허영심 충족이다. 수준 높은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한 국내의 업무 기간과 보상 수준은 글로벌 스탠더드와 괴리가 심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만큼 비상식적이고, 착취적이다. 시대는 바뀌었는데, 한국인들이 생각하고 일하는 방식은 여전히 윗사람의 명령에 의해 그저 그런 수준의 제품을 죽어라 열심히 찍어내는 가마솥의 도공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4차 산업혁명’의 구호가 요란하지만, 나는 요즘의 국가적 환경이 실패가 예정된 ‘양무운동’을 이끌었던 19세기 중국 관변 엘리트들의 거버넌스 수준과 엇비슷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의 ‘네트워크 사회’ 개념과는 동떨어진 졸렬한 카르텔 속에서, 아이디어 가로채기, 단가 후려치기, 관료주의적 형식주의가 횡행한다. 당연히 축적은 없다. ‘도공’이 ‘예술가’, 혹은 자율적인 ‘전문가’로 활약할 수 있는 사회의 혁신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환경에서, 산업의 혁신인들 발현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은 이미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침묵을 강요당한 비명으로 말이다.

김도훈 아르스 프락시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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