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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거기서는 생각할 시간이 있을까

입력
2017.05.17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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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세대는 새벽부터 밤까지 쉴 새 없이 일하는 게 성실이고 미덕이라고 믿었다. 높은 자리로 갈수록 솔선수범해서 열심히 일하는 게 아랫사람을 자연스레 따라오게 하는 리더십이었다. 하긴 외국에도 억대연봉을 받는 전문가들이나 고위 관리자 가운데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있다면 그 곳이 바로 신의 직장이다.

그런데 성실근면만으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어려울 때가 있다. 특히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내는 창조의 과정은 끊임없는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상상력의 근원은 생각할 시간이다. 또한 소통의 기본은 상대방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여유다.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 데 웃음 이상 좋은 게 없다. 해 지고 나면 술 한 잔 생각나는 것도 그런 여유와 웃음이 그리워서일지 모른다.

지난 몇 년간 정부 최상급 기관에서 일하는 분들을 볼 때마다 ‘웰던으로 바싹 구운 고기’를 보는 듯했다. 분명 최고의 전문성과 정치력 덕분에 발탁됐을 터인데도 기름기가 다 빠지도록 일하고 난 머리로 무슨 상상력을 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잔뜩 쌓인 일들을 정신 없이 하다 보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게 마련이다.

청와대에 근무하던 지인을 공식석상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오래 전부터 사석에서 유쾌하게 어울린 분이었다. 반갑게 안부를 묻고, 늘 하는 인사말을 건넸다. “바쁘시겠지만, 언제 술 한 잔 하시지요.” 그러자 진중한 대답이 돌아왔다. “저희 술 못 먹습니다.” “네?” “어울리는 것도 조심해야 하고, 또 술 마실 시간도 없네요. 내일도 새벽에 나가야 하고.” 문득 생각했다. 귀한 특등급 한우를 레이저 빔에 쪼여 물기 한 점 없게 구워먹는다면 무슨 맛일까?

지금 우리의 과제는 성실함만으로 풀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버거운 상대를 마주해 해법을 찾아내야 하는 외교, 복잡한 이해관계와 주체가 얽혀있는 경제, 그리고 고도화된 지식사회는 차별화된 창조력을 요구한다. 더 어렵고 새로운 답안을 찾아야 하기에 상상력과 소통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대선 때마다 다음 번 지도자는 술도 가끔씩 마시고 잘 노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도 열심히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과 잘 어울려야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소통할 수 있을 거였다.

실제로 우리는 보았다. 문을 굳게 닫으면 닫을수록 실세들은 더욱 강력해지고, 실무진의 상상력은 메말라갔다. 창조경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정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필기를 하고 있는 국무위원과 수석비서관들을 TV로 보면서, 과연 어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오갈 수 있을까 궁금했다. 만약 그 자리에서 학교에서의 창의성 교육과 스타트업 기업 육성 방안을 논의했다면 그 본질을 제대로 짚을 수 있었을까. 그 와중에 상상력과 창조력은 엉뚱한 데서 괴이한 모습으로 나와서 허망한 곳으로 흘러갔다. 정말로 일을 해야 할 사람이 직무를 충실히 다하지 않은 것도 문제였고, 유연하게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사람들이 역할을 다할 수 없었던 것도 문제였다.

빠른 경제발전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양적 성과에 매몰돼 왔다. 눈에 보이는 숫자와 그걸 이루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지를 보여 주는 게 평가 기준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양보다 질의 정치와 정책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유연하고 창조적인 대안을 찾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엄중하고 난해한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한 마디의 새로운 수사와 끊임없는 접점을 찾아내는 노력이 중요하다. 그래서 가끔은 청와대 보좌진이 칼퇴근을 하고, 여유도 느껴지게 하는 그런 거버넌스를 보고 싶다. 나태해지고 흐트러져도 된다는 면죄부는 결코 아니다. 더 큰 창조력을 발휘하기 위해 무거운 책임으로 지워지는 여가를 즐기면서, 지도자와 보좌진이 육즙이 살아있는 한우 한 점 맛깔 나게 구워주는 쉐프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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