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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병역이냐 징역이냐

입력
2017.07.0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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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6교시(오후 2시)만 되면 먼지 펄펄 나는 운동장 한 구석에 무릎을 꿇고, 손을 머리 위로 들고 있는 고1 학생이 있었다. 그는 그 자세로 급우 수십 명이 교사 구호에 일사불란하게 모형 총을 찌르고 내리던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적을 향해 ‘찔러총’을 하고 총검술 16개 동작을 하던 1990년대 초반 충북 어느 고등학교 교련 시간의 모습이다. “선생님, 교련 수업 안 받으면 안 되겠습니까?” 학기 첫 시간 이 한 마디에 그 학생은 곧장 끌려나가 얼차려를 받았다. “오늘도 수업 안 받을 건가”라는 질문에, 교련복을 입은 친구들과 달리 학교 체육복 차림이었던 그 학생은 “네”라고 했다.

친구들은 교련교사를 ‘멧돼지’라 불렀다. 전방 부대에서 중대장을 하다 제대했다는 멧돼지 교사는 성미가 참 고약했다. 당시 총검술 수업이 있으면 당번들이 모형 총을 교보재 창고에서 꺼내 수업 전까지 발 앞에 갔다 놔야 했는데, 멧돼지 교사는 하필 총을 싫어하던 그 학생을 총 당번으로 지목하곤 했다. 거부는 때마다 반복됐고, 무릎을 꿇는 일도 거듭됐다.

운동장을 연병장이라 불렀던 멧돼지 교사는 수업 시간 내내 진지하고, 엄했다. 자세가 흐트러지면 100m 정도 떨어진 축구골대를 전력으로 뛰어 돌아와야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너희들이 공부만 하고 있어선 안 된다.” “전쟁이 언제 날지 모르는데 그런 정신머리로는 안 된다.” 총검술 수업 마무리는, 항상 무릎을 꿇고 있던 그 친구를 향한 꾸짖음이었다. “이민을 가던지. 넌 대한민국 국민이 될 자격도 없어.”

그 땐 몰랐지만, 아마 그 친구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였을 것이다. 당시 우린 그 친구가 왜 그런 고충을 사서 겪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선생이 내리는 처벌이 부당하다고는 생각조차 안 했다. 교사가 학생에게 ‘그래도 되던’ 때였으니까. 우린 그에게 “고작 나무총인데 왜 그러냐”고 물었고, 그 친구는 “총 들고 사람 죽이는 걸 배우긴 싫다”는 말만 했다. 그 친구 때문에 단체기합을 받게 되면, 분에 못 이긴 덩치 큰 몇몇이 조리돌림 식 ‘응징’을 가하기도 했다. 성격 급한 아이들에게 그는, 친구들을 단체기합 받게 하는 이기적인 놈일 뿐이었으니까. 게다가 그 때는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말 자체가 없었고, 멧돼지 교사 같은 이에겐 총을 잡지 않으려는 그 친구는 ‘정신머리 썩어빠진 놈’일 뿐이었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가 ‘양심적 병역 거부권을 보장하는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국방부에 권고했다. “이제는 대체복무제 도입에 국민적 합의가 무르익었다”는 이유였다. 인권위는 대체복무자를 공정하게 판정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고, 합리적인 절차와 기준을 마련할 것을 제안했다. 현역으로 가는 사람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복무기간은 1.5배 수준으로 늘리는 게 좋겠다는 의견도 곁들였다.

20년이 넘은 교련수업 시간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한 편으로 우리 사회의 진보가 반가웠지만 속은 더부룩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저토록 총을 잡지 못하겠다는 이유만으로, 징역살이를 무릅쓰는 이들에게 대안 하나 마련해 주지 못하고 있었다. 양심적 병역 거부와 관련해, 유죄(대법원)와 무죄(하급심)로 법원 판결도 엇갈린다. 헌법재판소에 제기된 병역법 위헌심판은 언제 결론이 날 지 모르고, 국방부는 여전히 인권위 권고를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상당수 여론은 아직은 아니라고 얘기한다.

집총 거부자에게 총을 나르라고 했던 멧돼지 교사처럼, 세상은 여전히 우리와 믿음이 다를 뿐인 소수 청년들에게 병역이냐 징역이냐를 강요하고 있다. 그들에게 병역법 위반으로 징역을 살게 하고, ‘빨간 줄’을 긋게 하는 것만이 과연 최선일까? 그들이 다른 방식으로 국민의 의무를 다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우회로는 진정 없는 건지, 묻고 싶다.

남상욱 사회부 기자 thot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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